백거이가 10대 때 쓴 놀라운 시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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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언덕의 풀 이별 노래
백거이
언덕 위에 우거진 풀들
해마다 한 번 시들었다 무성해진다네.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
봄바람 불면 다시 돋아난다네.
방초는 멀리 뻗어 옛길을 덮고
맑은 하늘 푸른 빛은 황폐한 성까지 닿네.
또 그대를 떠나보내니
이별의 슬픔 가득하다네.
賦得古原草 送別
離離原上草 一歲一枯榮
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
遠芳侵古道 晴翠接荒城
又送王孫去 萋萋滿別情
-------------------------------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10대 시절에 쓴 시입니다. 원문 제목은 ‘부득고원초송별’인데, ‘초(草)’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백거이가 15세, 혹은 18세 때였다고 합니다. 시험을 보러 수도 장안(長安)에 처음 갔다가 당시 이름난 시인인 고황(顧況)을 찾아갔지요. 고황은 소년의 이름이 ‘거이(居易)’인 것을 보고 이에 빗대어 “장안의 쌀값이 비싸니 살기가 어려울 텐데(長安米貴 居住不易)”라며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백거이가 이 시를 보여주자 “이런 재주가 있다면 살아가기가 쉬울 것(有才如此 居亦容易)”이라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이때의 칭찬 덕분에 소년 백거이의 이름이 널리 퍼졌지요.
시 원문에 나오는 ‘야화(野火)’는 들판의 마른 풀을 태우기 위해 지르는 불을 가리킵니다. ‘야화소부진 춘풍취우생(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은 들불을 놓아도 풀은 완전히 다 타 없어지지 않고 봄이 되면 다시 파릇파릇 돋아나는 것을 묘사한 것이죠. 간결하면서도 깊은 함의를 지닌 이 구절이 바로 이 시의 백미입니다.
이 명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선 ‘소인(小人)은 제거해도 다 사라지지 않아 마치 풀이 덩굴 자라듯 한다’는 사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하지요. 또는 사악함이 근절되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치세(治世)와 난세(亂世)가 회돌이처럼 되풀이되는 세상사를 비유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물론 백거이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요.
프랑스 문학평론가 롤랑 바르트가 “독자는 작가”라고 했듯이, 시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달리 읽히는 ‘두 개의 텍스트’이기도 합니다. 독자는 각자의 시각으로 읽으면서 저마다 새로운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시는지요.
백거이는 시를 퇴고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였습니다. 매번 시를 쓰고 나서 동네 할머니에게 들려주고는 알아듣지 못하면 알아들을 때까지 다듬었습니다. 이렇게 치열한 노력을 평생 거듭한 덕분에 불후의 시인이 될 수 있었지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장한가(長恨歌)’입니다. 이 시에서 그는 당 현종의 방탕한 생활을 ‘짧은 봄밤을 한탄하며 중천에 해가 떠서야 일어나니 황제는 이로부터 조회를 보지 않았네’라고 꼬집었습니다. 현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교태를 부린 양귀비에 대해서는 ‘후궁의 미인은 삼천이 넘었지만 삼천의 총애를 그녀 혼자 받았네’라고 풍자했지요.
이렇게 생생한 묘사와 비유에 힘입어 그의 시는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저잣거리 목동까지 애송할 정도가 됐지요. 중국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 통일신라와 일본에서도 인기가 높아 신작이 나오기 무섭게 전해졌고, 그때마다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작품만 3800여 수에 달하니 그 열정 또한 놀랍고 부럽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백거이
언덕 위에 우거진 풀들
해마다 한 번 시들었다 무성해진다네.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
봄바람 불면 다시 돋아난다네.
방초는 멀리 뻗어 옛길을 덮고
맑은 하늘 푸른 빛은 황폐한 성까지 닿네.
또 그대를 떠나보내니
이별의 슬픔 가득하다네.
賦得古原草 送別
離離原上草 一歲一枯榮
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
遠芳侵古道 晴翠接荒城
又送王孫去 萋萋滿別情
-------------------------------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10대 시절에 쓴 시입니다. 원문 제목은 ‘부득고원초송별’인데, ‘초(草)’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백거이가 15세, 혹은 18세 때였다고 합니다. 시험을 보러 수도 장안(長安)에 처음 갔다가 당시 이름난 시인인 고황(顧況)을 찾아갔지요. 고황은 소년의 이름이 ‘거이(居易)’인 것을 보고 이에 빗대어 “장안의 쌀값이 비싸니 살기가 어려울 텐데(長安米貴 居住不易)”라며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백거이가 이 시를 보여주자 “이런 재주가 있다면 살아가기가 쉬울 것(有才如此 居亦容易)”이라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이때의 칭찬 덕분에 소년 백거이의 이름이 널리 퍼졌지요.
시 원문에 나오는 ‘야화(野火)’는 들판의 마른 풀을 태우기 위해 지르는 불을 가리킵니다. ‘야화소부진 춘풍취우생(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은 들불을 놓아도 풀은 완전히 다 타 없어지지 않고 봄이 되면 다시 파릇파릇 돋아나는 것을 묘사한 것이죠. 간결하면서도 깊은 함의를 지닌 이 구절이 바로 이 시의 백미입니다.
이 명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선 ‘소인(小人)은 제거해도 다 사라지지 않아 마치 풀이 덩굴 자라듯 한다’는 사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하지요. 또는 사악함이 근절되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치세(治世)와 난세(亂世)가 회돌이처럼 되풀이되는 세상사를 비유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물론 백거이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요.
프랑스 문학평론가 롤랑 바르트가 “독자는 작가”라고 했듯이, 시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달리 읽히는 ‘두 개의 텍스트’이기도 합니다. 독자는 각자의 시각으로 읽으면서 저마다 새로운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시는지요.
백거이는 시를 퇴고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였습니다. 매번 시를 쓰고 나서 동네 할머니에게 들려주고는 알아듣지 못하면 알아들을 때까지 다듬었습니다. 이렇게 치열한 노력을 평생 거듭한 덕분에 불후의 시인이 될 수 있었지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장한가(長恨歌)’입니다. 이 시에서 그는 당 현종의 방탕한 생활을 ‘짧은 봄밤을 한탄하며 중천에 해가 떠서야 일어나니 황제는 이로부터 조회를 보지 않았네’라고 꼬집었습니다. 현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교태를 부린 양귀비에 대해서는 ‘후궁의 미인은 삼천이 넘었지만 삼천의 총애를 그녀 혼자 받았네’라고 풍자했지요.
이렇게 생생한 묘사와 비유에 힘입어 그의 시는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저잣거리 목동까지 애송할 정도가 됐지요. 중국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 통일신라와 일본에서도 인기가 높아 신작이 나오기 무섭게 전해졌고, 그때마다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작품만 3800여 수에 달하니 그 열정 또한 놀랍고 부럽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