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가의 침대 밑에 짱 박힌 낡은 카디건처럼 느껴졌을 때 넌 나를 입고 가장 좋아했던 옷이라고 말해줬지. (When I felt like I was an old cardigan under someone's bed, You put me on and said I was your favorite.)”

현존하는 가장 성공한 싱어송 라이터, 실력과 미모, 그리고 부와 젊음까지 다 갖춘 테일러 스위프트는 자신의 뮤직 비디오, 카디건에서 헐렁하고 넉넉한 단추 달린 스웨터를 주섬주섬 주워 입으며 이렇게 읊조린다. 세상을 다 가진 이에게도 포근하게 안아주는 누군가가 필요하고, 늘 유행을 선도하며 새끈하게 차려 입는 이들도 할아버지의 푸근한 미소, 할머니의 쿰쿰하지만 다정한 살 내음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옷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이헌
ⓒ이헌
필자에게도 카디건은 특별한 사연이 있는 옷이다. 교복 자율화의 바람이 드세던 1980년내 말 소위 8학군이란데로 이사를 들어가 집 앞의 학교를 두고 쫓겨나 멀리멀리 떨어진 고등학교에 배정을 받은 필자는 감색 재킷과 회색 바지에 빨간 넥타이를 매고 머리를 빡빡 깎아야 했던 학교의 복장 규정이 진저리나게 싫었다. 고교시절부터 이미 옷 사랑이 지극한 중증 옷 환자였던 필자에게 매일 똑 같은 옷을 입으라는 몰개성의 강요는 나라를 잃은 설움에 버금가는 슬픔이었다. 하지만 사이사이 틈새는 있었으니 보온을 핑계로 교복 안에 슬쩍 숨겨 입던 카디건 몇 벌은 멋내기에 목마른 빠박머리 소년에게 숨통을 틔워주는 효자 아이템이었던 거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카디건 얘기도 들어 보셨는지? 펑크록, 얼터너티브 록의 지존,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1993년 MTV의 언플러그드에서 심드렁하게 입고 나온 후 꽃거지룩(그런지룩)의 전설로 박제된 중고 카디건은 미국 시애틀의 어느 헌 옷 가게에서 주워 입다시피 한 그의 일상복이었다. 충격적인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그의 아이 돌보미가 빨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가 2015년 경매에 내놓자 13만7500 달러에 팔린 후 4년만인 2019년에 33만4000달러로 다시 낙찰되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카디건으로 두 번이나 이름을 날렸다.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성공에까지 반기를 들었던 충실한 록주의자도 그의 짧은 음악 생애에 가장 상업적이던, 그래서 아마도 출연이 내키지 않았을 방송에 출연할 때 자신을 보듬고 용기를 주는 옷으로 카디건을 선택했던 것 같다.
'꽃거지룩'의 원조 커트 코베인의 카디건이 4억원이라고?
그나저나, 혹 이 글을 읽으면서 눈치를 챈 이들도 있으리라. 우리가 흔히 '가디건'이라고 부르는 그 옷을 계속 카디건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것을? 언제부턴가 한국에선 가디건으로 불리고 있지만 영문 표기도, 발음도 카디건이 옳으니 이제부터라도 함께 카디건이라고 부르기로 제안하면서. 단추가 달린 스웨터를 왜 카디건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카디건의 역사를 알아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디건은 고안자의 칭호에 따른 명칭이다. 이 스웨터의 고안자는 제 7대 카디건 백작(Earl of Cardigan), 제임스 브루데넬 (James Thomas Brudenell)이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관종적 기질을 타고 났던지 일찌감치 장군이 되고 싶던 그는 군에 입대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장교로 자원했고 정식으로 백작의 지휘에 오르자 자신이 이끄는 부대의 사병들의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부대보다 더 멋있어 보이기 위해 초호화 장비를 지급한다. 이윽고 발발한 크림 전쟁에서 그의 부대는 바라클라바(Balaclava) 계곡에 투입된다. 진짜 전투가 아니라 장군 놀이에만 관심이 있던 그는 뒤로 숨어 전장으로 부대를 몰아 넣는다.
7th Earl of Cardigan
7th Earl of Cardigan
전술상 자살 돌격이나 다름 없던 그 전쟁에서 부대는 큰 피해 입지만 우수한 장비 탓이었을까?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목표지점에 도달한다. 상처뿐인 영광이었지만 무책임한 장군 때문에 아깝게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죽음은 정치적인 이유로 그냥 잊혀졌고 본국으로 돌아간 그는 러시아를 상대로 용맹을 떨친 두려움을 모르는 귀족출신 장군으로 과대 포장되어 영국군의 위세를 전 유럽에 자랑하는 최적의 홍보 소재로 선택된다. 영문도 모르는 대중에게 그는 전쟁 신화로, 유능한 전략가로 찬사를 얻게 된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거짓 무용담을 쏟아내는 일이었다. 전쟁 영웅으로 돌아온 그의 초상화, 그의 영웅담을 담은 책이 불티나게 팔렸고 사교계를 누비는 그의 패션과 귀족 취미는 모두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야말로 최고의 인플루언서가 탄생한 것이다.

종종 보온을 목적으로 그는 코트 안에 니트로 짠 단추가 달린 조끼를 입고 다녔었는데 후에 그의 코트의 뒷 자락이 불에 타는 일을 경험한 후 조끼에 소매를 붙이고 뒷자락을 짧게 만든 오늘날의 카디건과 유사한 형태의 옷을 고안해 입고 다니게 된다. 그 옷은 카디건 백작이 즐기던 많은 스포츠에 적절하게 어울렸고, 전장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만들어 입었다는 거짓 무용담에 힘을 입어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고 결국 ‘카디건 백작의 보온 스웨터‘라는 이름이 축약되면서 카디건이라는 이름을 획득하게 된다.
'꽃거지룩'의 원조 커트 코베인의 카디건이 4억원이라고?
이렇게 멋진 영웅의 옷은 꾸준히 다양한 계층에 사랑을 받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푸근하고 나이든 이미지를 갖게 된다. 하지만 남성복으로서의 근사하고 힙한 이미지는 쿨 내음 진동하는 남자 중 남자 스티브 맥퀸을 통해 완성된다.

황야의 7인에서 시작된 필모그레피는 대탈주, 불리트, 르망 같은 그의 마초적 남성성을 강조한 영화들로 점철되어 있는데 신시내티 도박사(The Cincinnati Kid, 1965), 불리트(1968) 같은 영화에서 그가 입고 등장한 숄칼라 카디건(카라가 둥근 숄 모양의 카디건)은 남성복의 역사에 길이 남는 최고의 아이템으로 등극한다. 한 때 한 럭셔리 브랜드가 비슷한 디자인의 카디건에 그의 이름을 붙여 판매를 시작하자 그의 아들로부터 아버지의 이미지를 도용했으니 최소한 200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고액의 소송을 휘말리기도 한다. 또 다시 카디건은 역사상 가장 멋있던 남자를 정의하는 의미심장한 옷이 된 것이다. 한편 카디건의 여성성은 창의력 넘치는 여성복의 해방자, 디자이너 코코 샤넬 덕분이다. 남성복을 입기 즐겼던 샤넬은 목이 좁은 남성용 스웨터를 입다가 공들인 헤어스타일이 망가지는 상황이 싫었고 결국 당시까진 남성복이던 카디건을 오늘날의 여성들에게 널리 사랑 받는 옷으로 정착시킨다.
영화 블리트
영화 블리트
우리의 몸을 따뜻하게 해줄 뿐 아니라 마음까지 안아주던 옷 카디건, 견딜 힘과 용기를 북돋고 걸출한 한 인물을 정의하며 여성들에겐 자존감과 남성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이뤄낸 이 특별한 옷 카/디/건! 이제 그의 이름을 정확히 불러줄 때가 된 것 같다. 가디건이 아니라 "카r디건"이라고 불러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