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문화예술과 시장의 적정 거리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세계 대공황 직후인 1936년 발간한 저서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통해 당시 주류였던 고전학파의 자유방임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닦은 케인스였지만 문화예술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생각이 달랐다.

케인스는 영국 음악예술진흥위원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할 때 “문화예술 정책은 ‘팔길이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손과 몸이 팔 길이만큼 떨어져 있듯이 문화예술과 정부도 적정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정부는 문화예술에 대해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해선 안 된다는 게 케인스의 소신이었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아야

최근 국내에서 일부 문화예술 정책과 관련해 벌어지고 있는 논란을 지켜보면 팔길이 원칙의 현대적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서정가제가 그런 사례다. 2003년 처음 도입된 도서정가제는 말 그대로 책을 판매할 때 ‘정가(定價)’에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온라인 서점의 가격 파괴 공세로부터 지역 중소 서점을 보호하고, 출판시장의 다양성을 제고한다는 게 취지였다. 정부가 상품 가격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제도 도입 때부터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다. 정부가 지난 1월 온라인 창작물인 웹툰과 웹소설은 도서정가제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고, 영세 서점은 대형 서점보다 더 높은 할인율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영화산업에 대한 ‘홀드백(Hold Back)’ 법제화 논란도 비슷한 사례다. 정부가 1월 말 모태펀드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는 영화는 홀드백 조건을 준수해야 한다고 발표한 게 발단이 됐다. 홀드백이란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가 IPTV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에 풀리기 전까지 유예기간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코로나19를 거치며 극장에서 개봉된 영화가 한두 달 새 OTT로 직행하는 사례가 생기면서 영화관 사업자들을 중심으로 홀드백을 법으로 강제해줄 것을 요구해왔다.

누구를 위한 규제인가

하지만 도서정가제와 홀드백 법제화는 적잖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출판사들은 도서정가제가 필요한 이유로 중소형 서점 보호를 내세운다. 하지만 대형 서점보다 중소형 서점에 더 비싼 가격에 책을 공급하는 출판사들이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다양한 할인 프로모션이 일반화된 웹툰과 웹소설의 경우 창작자들이 나서서 도서정가제를 반대하고 있다. 홀드백 법제화도 사실상 극장 사업자들만을 위한 제도라는 지적이 나온다. 블록버스터급 영화와 달리 상영관을 충분히 잡기 힘든 중소 규모 영화들은 홀드백 법제화가 흥행수익 감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와 홀드백 법제화는 기본적으로 문화예술 상품의 유통을 시장에만 맡겨두면 ‘시장 실패’가 발생하기 때문에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전제로 깔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장 실패란 문화예술의 다양성 저해다. 하지만 시장은 이윤 추구의 공간이면서도 문화예술 창작자와 소비자가 만나 상호 작용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문화예술이 시장으로부터 멀어지는 반대급부는 정부의 규제에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예술과 시장 간 ‘적정 거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