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웃고 난 뒤 남는 긴 여운…권혁웅 시집 '세계문학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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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트림의 왕이자 이산화탄소 발생기라면 / 이 동물은 방귀의 왕이자 암모니아 발생기입니다.
/ 넓은 거실에 서식하면서 소파로 위장하고 있죠 / 중추신경은 리모컨을 거쳐 TV에 가늘게 이어져 있습니다.
"(권혁웅 시 '동물의 왕국'에서)
권혁웅 시인의 신작 시집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된 시 '동물의 왕국'의 부제는 '동물계 소파과 의자속 남자 사람'이다.
대한민국 중년 남성의 평범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핵심을 잡아내 촌철살인의 문장으로 묘파한 이 시는 이런 구절로 이어진다.
"이 동물은 성체가 되자마자 수컷끼리 모여서 각축을 벌이는데 / 이런 집단이 군대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 거기를 끔찍이 싫어하면서도 / 거기서 축구 한 얘기는 자꾸 떠벌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시집에는 이처럼 일상의 풍경 속에서 호기심 가득한 아이의 시선으로 시인이 길어 올린 유머에 한바탕 웃을 만한 대목이 많다.
"오늘은 모르는 사람이 생일을 축하한다며 / 카카오톡으로 아메리카노를 보내왔다 / 신한생명 담당 CF였다 / 그가 나의 이생과 후생을 책임질 거라 생각하니 / 걱정이 앞선다,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보이던데"(시 '최후의 심판'에서)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40년 만에 만난 동창이 물었다 '너도 나한테 맞았니?' '아니, 우린 같은 반도 아니었고 등하교길도 달랐어.' 짱에게는 원죄가 있으며 원장면도 있다.
내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쳐도 그는 나를 때리던 아득한 추억을 더듬고 있었다"(시 'E=mc²'에서)
이 시집을 집어 든 독자라면 '요즘 시인들이 쓴 시도 이렇게 웃기고 재미있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할 법도 하다.
읽어도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난해시들이 시의 주류를 이루는 시절에 더욱 반가운 시집이다.
하지만 유머와 위트만 있다면 그건 시가 아니라 농담에 불과할 터. 겉으로 유쾌 발랄한 시인의 목소리 이면엔 현대사회의 모순과 우스꽝스러운 점을 때론 이리저리 비꼬고 비틀고, 때론 직시하고 직면하는 진중한 사유가 수맥처럼 흐르고 있다.
'잠만 잘 분'이라는 광고전단을 본 시인은 떠오른 생각을 이렇게 펼쳐내기도 한다.
"그래도 국민연금과 지역 의보 통지서는 / 언덕을 올라와, 옥탑까지 올라와, / 속옷과 양말 사이에서 기어이 그이를 찾아내고 / 밤에 내려다보면 붉게 빛나는 수많은 십자가들 아래 / 제각각 누워 있는 잠만 잘 분, / 성탄도 부활도 없이 / 잠만 잔다는 건 꼼짝도 하지 말라는 것"(시 '잠만 잘 분'에서)
'잠만 잘 분'은 '귀신'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이 귀신은 무한경쟁의 현대사회에서 낙오된 가엾은 영혼의 동의어일 것이다.
"영동대교 아래 고수부지에는 / 지금도 몸이 젖어 재채기를 해대는 가장들이 많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신발이라도 신을걸 (중략) 대리운전 삼 년에 봉지 커피만 스무 박스예요 / 얼굴이 까맣게 탄 남자들이 / 막차 끊긴 위성도시, 처마 아래를 어슬렁거린다"(시 '귀신들'에서)
굳이 자살률이나 비정규직 노동 통계 같은 걸 들춰보지 않아도, 이런 시들을 통해 독자는 한국 사회의 가혹한 현실을 자연스레 돌아보게 된다.
따라서 권혁웅의 시를 읽는 시간은 우리 주위의 '귀신의 시간'을 생각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앞의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GS25 카운터에서 밤을 새는 젊은이들, / 24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 한 시간이야말로 귀신의 시간이다 / 최저임금에도 속해있지 않은 시간이다"
한바탕의 웃음 이후 쓸쓸함과 비애라는 긴 여운을 남기는 '세계문학전집'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권혁웅이 전작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이후 10년 만에 펴내는 여섯 번째 시집이다.
소규모 출판사 타이피스트가 새롭게 시작한 '타이피스트 시인선'의 첫 번째 책으로 나왔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새처럼 가볍게 날지는 못해도, 시인이 종종걸음으로 땅 위를 걸으며 유머와 위트로 현실을 비틀어 보여주는 맛이 썩 괜찮은 시집이다.
"날기 위해 새들은 직장과 방광을 짧고 가볍게 유지하느라 / 날아가면서도 찍, 앉아서도 찍, 물똥을 싸지만 / 나는 나는 걸 포기했으므로 / 내 안에 오래 궁굴린 것을 들고 / 천천히 걸어간다 이쪽은 신사용, 저쪽은 숙녀용 / 너희가 쥘 수 없는 휴지를 들고 / 너희처럼 종종걸음으로"(시 '날아가는 새들을 부러워하지 아니함'에서)
타이피스트. 152쪽.
/연합뉴스
/ 넓은 거실에 서식하면서 소파로 위장하고 있죠 / 중추신경은 리모컨을 거쳐 TV에 가늘게 이어져 있습니다.
"(권혁웅 시 '동물의 왕국'에서)
권혁웅 시인의 신작 시집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된 시 '동물의 왕국'의 부제는 '동물계 소파과 의자속 남자 사람'이다.
대한민국 중년 남성의 평범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핵심을 잡아내 촌철살인의 문장으로 묘파한 이 시는 이런 구절로 이어진다.
"이 동물은 성체가 되자마자 수컷끼리 모여서 각축을 벌이는데 / 이런 집단이 군대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 거기를 끔찍이 싫어하면서도 / 거기서 축구 한 얘기는 자꾸 떠벌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시집에는 이처럼 일상의 풍경 속에서 호기심 가득한 아이의 시선으로 시인이 길어 올린 유머에 한바탕 웃을 만한 대목이 많다.
"오늘은 모르는 사람이 생일을 축하한다며 / 카카오톡으로 아메리카노를 보내왔다 / 신한생명 담당 CF였다 / 그가 나의 이생과 후생을 책임질 거라 생각하니 / 걱정이 앞선다,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보이던데"(시 '최후의 심판'에서)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40년 만에 만난 동창이 물었다 '너도 나한테 맞았니?' '아니, 우린 같은 반도 아니었고 등하교길도 달랐어.' 짱에게는 원죄가 있으며 원장면도 있다.
내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쳐도 그는 나를 때리던 아득한 추억을 더듬고 있었다"(시 'E=mc²'에서)
이 시집을 집어 든 독자라면 '요즘 시인들이 쓴 시도 이렇게 웃기고 재미있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할 법도 하다.
읽어도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난해시들이 시의 주류를 이루는 시절에 더욱 반가운 시집이다.
하지만 유머와 위트만 있다면 그건 시가 아니라 농담에 불과할 터. 겉으로 유쾌 발랄한 시인의 목소리 이면엔 현대사회의 모순과 우스꽝스러운 점을 때론 이리저리 비꼬고 비틀고, 때론 직시하고 직면하는 진중한 사유가 수맥처럼 흐르고 있다.
'잠만 잘 분'이라는 광고전단을 본 시인은 떠오른 생각을 이렇게 펼쳐내기도 한다.
"그래도 국민연금과 지역 의보 통지서는 / 언덕을 올라와, 옥탑까지 올라와, / 속옷과 양말 사이에서 기어이 그이를 찾아내고 / 밤에 내려다보면 붉게 빛나는 수많은 십자가들 아래 / 제각각 누워 있는 잠만 잘 분, / 성탄도 부활도 없이 / 잠만 잔다는 건 꼼짝도 하지 말라는 것"(시 '잠만 잘 분'에서)
'잠만 잘 분'은 '귀신'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이 귀신은 무한경쟁의 현대사회에서 낙오된 가엾은 영혼의 동의어일 것이다.
"영동대교 아래 고수부지에는 / 지금도 몸이 젖어 재채기를 해대는 가장들이 많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신발이라도 신을걸 (중략) 대리운전 삼 년에 봉지 커피만 스무 박스예요 / 얼굴이 까맣게 탄 남자들이 / 막차 끊긴 위성도시, 처마 아래를 어슬렁거린다"(시 '귀신들'에서)
굳이 자살률이나 비정규직 노동 통계 같은 걸 들춰보지 않아도, 이런 시들을 통해 독자는 한국 사회의 가혹한 현실을 자연스레 돌아보게 된다.
따라서 권혁웅의 시를 읽는 시간은 우리 주위의 '귀신의 시간'을 생각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앞의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GS25 카운터에서 밤을 새는 젊은이들, / 24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 한 시간이야말로 귀신의 시간이다 / 최저임금에도 속해있지 않은 시간이다"
한바탕의 웃음 이후 쓸쓸함과 비애라는 긴 여운을 남기는 '세계문학전집'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권혁웅이 전작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이후 10년 만에 펴내는 여섯 번째 시집이다.
소규모 출판사 타이피스트가 새롭게 시작한 '타이피스트 시인선'의 첫 번째 책으로 나왔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새처럼 가볍게 날지는 못해도, 시인이 종종걸음으로 땅 위를 걸으며 유머와 위트로 현실을 비틀어 보여주는 맛이 썩 괜찮은 시집이다.
"날기 위해 새들은 직장과 방광을 짧고 가볍게 유지하느라 / 날아가면서도 찍, 앉아서도 찍, 물똥을 싸지만 / 나는 나는 걸 포기했으므로 / 내 안에 오래 궁굴린 것을 들고 / 천천히 걸어간다 이쪽은 신사용, 저쪽은 숙녀용 / 너희가 쥘 수 없는 휴지를 들고 / 너희처럼 종종걸음으로"(시 '날아가는 새들을 부러워하지 아니함'에서)
타이피스트. 152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