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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법의 처벌을 받는다. 그런데 잘못이란 무엇일까. 여기엔 명확한 정의와 논리적 근거가 필요하다. 그래서 판사들은 법의 논리를 치밀하게 하는 데 광적으로 집착한다.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은 그에 대한 책이다. 책을 쓴 손호영은 대법원 재판연구관이자 법학박사다. 그는 각 장마다 대법원 판결문 속 문장을 짤막이 보여준 뒤 왜 판사가 이렇게 판결문을 썼는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판결문은 딱딱하고 어려운 말을 쓰는 것으로 ‘악명’ 높다. 저자는 이를 쉬운 말로 풀어낸다. 단순한 해설서는 아니다. 판사의 판단을 두둔하는데 머물지도 않는다. 저자는 때로 의문을 표하기도 하고,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우리 판사들도 누군가에게 이용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죠" [서평]
어떤 가게에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지갑을 가게 주인이 주었다. 주위에 있던 손님에게 물었다. “이 지갑, 선생님 것이 맞나요?” 그 손님은 자기 것이 아니지만 “맞다”면서 가져갔다.

진짜 지갑 주인이 그 손님을 고소했다. 1심은 이를 절도로 보고 50만원의 벌금을 선고했다. 2심은 절도가 아닌 사기로 보고 50만원의 벌금형을 내렸다.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대법원은 사기라고 판결했다.

1심부터 3심까지 ‘유죄, 벌금 50만원’은 같았다. 절도냐 사기냐는 사소해보인다. 하지만 판사는 다르게 본다고 한다. 저자는 “결론은 동일하게 유지하면서 각 재판부는 이를 구성하는 이유를 열심히 채워 넣었다”며 “잘못이라는 것을 두루뭉술하게 이해하지 않고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위법인지를 판단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한항공의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은 법정에서도 다뤄졌다. 대법원에서 쟁점이 된 건 푸시백(계류장의 항공기를 차량으로 밀어 유도로까지 옮기는 것)을 중단시키고 비행기를 다시 탑승구로 돌린 것이 ‘항로 변경’에 해당하느냐였다.

항공보안법은 위계 또는 위력으로 운항 중인 항공기의 항로를 변경한 사람을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이 법은 항로가 무엇인지 정의해 두지 않았다.

대법관들은 법에서 용어를 정의하지 않았다면 사전적 정의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봤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항로를 ‘항공기가 통행하는 공로(空路)’로 정의했기에 지상에서의 이동 경로는 항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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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요청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모호한 말이 판결문에 들어가기도 한다. 여성으로 성전환 사람이 성별 정정을 요구한 사건이었다. 이 사람에게 미성년 자녀가 있는 게 문제였다. 2011년 대법원은 이와 같은 사건에 대해 ‘자녀의 행복과 이익’을 이유로 성별 정정을 허용하지 않았다. 2022년엔 ‘시대의 요청’이란 말을 쓰면서 다르게 판결했다.

항상 나름의 논리적 이유를 붙여야 하는 게 판사의 숙명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판결에 수긍하지 않을 것이고, 법의 권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른 맹점도 있다.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판결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또한 사법 체계의 숙명이지만, 법이 힘 있는 사람, 돈 가진 사람에게 기울어 있다는 비판을 듣는 이유가 된다.

저자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우리(판사들)의 태도와 자세가 누군가에게 이용당할지 모른다는 걱정도 물론 한다. 개개의 사건에서는 올바른 판단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올바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그런 우려이다.”

작고 얇은 책이지만 내용은 제법 묵직하다. 법이란 무엇인지, 판사들은 어떤 생각으로 판결을 내리는지 엿볼 수 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