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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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내려갈 곳도 없다. 한번만 더 믿어보자.”

SK그룹주는 증권가에서 양치기 소년으로 불린다. 개인과 기관 모두 불신의 뿌리가 깊다. 그도 그럴 것이 SK그룹은 지난 몇년간 수차례 주주들의 뒷통수를 쳤다. ‘2025년 주가 200만원’을 공언한 SK㈜의 주가는 13만원대까지 추락했고, 곧 흑자전환한다던 SK온은 올해도 적자탈출이 요원하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유튜브에 출연해 주가 하락에 대해 사과까지 했지만 주주들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해 9월 SK온의 모회사 SK이노베이션이 대규모 유상증자를 통해 1조1400억원을 확보하자 민심은 폭발했다. 주주들은 회사의 운영자금을 주주로부터 조달한다며 주식 카페에서 원색적인 비난글을 쏟아냈다. 주가는 유상증자 발행가액(13만9600원) 아래까지 떨어졌다.

뿔난 SK이노베이션 주주들은 서린사옥으로 몰려가 ‘SK온 상장 결사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SK그룹의 행보를 돌이켜봤을 때 쪼개기 상장을 통해 또다시 주주들을 울릴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기관도 마찬가지다. 애널리스트나 펀드매니저들은 “뭘해도 믿지 못하겠다”는 분위기다. 삼성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SK온의 배터리사업 가치가 ‘0’원”이라는 혹평을 내놓기도 했다. 키움증권은 목표주가를 현재 주가보다 낮은 11만6000원으로 깎았다.

하지만 최근 여의도 증권가를 중심으로 조금씩 변화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첫번째 변화의 계기는 SK이노베이션의 역대급 자사주 소각이다. 이 회사는 지난 5일 기취득한 자기주식 491만9974주를 이달 20일에 소각하기로 했다고 공시했다. 소각 예정 금액은 총 7936억원으로 전체 시총의 약 6.7%에 달하는 규모다.

어려운 재무 상황에서도 주주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자사주 소각 발표 이후 주가는 2.2% 오르는 데 그쳤지만, 20일부터 소각이 시작되면 주가 상승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SK㈜에 대한 시각은 좀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 SK그룹 경영 최고협의기구인 SK수펙스추구협의회의 최창원 신임 의장은 임원들에게 고강도 쇄신을 주문하고 있다. 20년만에 ‘SK 토요 사장단 회의’를 부활시켰고 임원 의전에도 힘을 뺐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오너 일가인 최 의장의 등판과 계열사 CEO의 대규모 교체 이후 조직 전체에 긴장감이 돌고 있다”며 “변화의 의지가 읽혀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 기업들의 역사를 돌아봤을 때, 이런 변화의 시기가 투자기회일 때가 많았다”고 덧붙였다.

증권사들도 긍정적인 보고서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대신증권은 ‘기업가치 밸류업에 진심’이란 보고서를 내고 목표주가를 25만원으로 높였다. 현재 주가에서 약 30% 상승할 여력이 있다고 본 것이다. SK텔레콤, SK스퀘어, SK E&S 등 거느린 계열사들의 실적 개선이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봤다.

SK㈜가 보유하고 있는 자사주(지분율 24.6%)도 ‘히든밸류(숨겨진 가치)’로 주목받고 있다. 박종렬 흥국증권 연구원은 “보유 자사주 중 50%는 3~5년에 걸쳐 소각하고 나머지는 성장재원으로 활용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며 “다른 지주사에 비해 낮은 배당성향과 배당수익률도 제고시켜야 한다”고 했다.

투자자들은 오는 26일 발표 예정인 정부의 ‘기업가치 밸류업 프로그램’에 발맞춰 SK㈜가 어떤 주주환원책을 내놓을 지 기대하고 있다. 한 헤지펀드운용사 매니저는 “SK이노베이션이나 SK㈜의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수준)은 역사적 저점 수준”이라며 “시장의 신뢰만 회복해도 주가는 크게 반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만수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