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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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직원 A는 회사 여직원 B의 ‘장난’에 심각한 부부 갈등을 겪었다. 새벽에 B가 A에게 연인인 척 하는 카톡을 보냈고, 잠귀가 밝은 피해자의 아내가 카톡의 내용을 보게 된 것. 오해한 아내는 A를 깨워 크게 화를 냈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A가 B에 항의하자 B는 "술 마시다가 다른 친구에게 장난치려고 한 것인데 실수로 보냈다"며 핑계를 댔다. 아내에게 해명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아내분 저한테 화내실 거니까 싫어요”라는 것. 이후에도 이런 일이 몇차례 더 일어나 크게 화를 냈지만, “남자들도 새벽에 이런 톡 받으면 기분 나쁘죠? 여잔 어떨 거 같아요?”라는 어이없는 답만 돌아왔다.

회사 휴게실 냉장고에 점심 도시락을 보관하는 여직원 C씨. 종종 내용물이 버려져 있는 일을 경험했지만 범인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동료가 "그거 후임인 여직원 D가 버렸다"고 알려줬다. 알고 봤더니 C로부터 근무 중 계속 핸드폰만 보고 일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은 D가 평소 불만 때문에 저지른 짓이었다. C가 화를 내자 D는 "보지도 않았으면서 누명을 씌운다"며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다. 동료가 "내가 봤다"며 나서자 D는 "내게 소리를 지른 게 갑질이다. C와 동료가 짜고 나를 괴롭힌다"며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다. C가 더 억울했던 것은 부서장이 "후임 하나도 제대로 못 잡는다"며 C와 동료를 나무랐다는 점이다.

직장에서 후임자들이 상급자들을 괴롭히는 '을질'이나 '허위 신고'의 비중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4일 서유정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연구원이 최근 수행한 '직장 내 괴롭힘 성립기준 및 사업장 모니터링 체계 구축 연구'에 따르면 직장내 괴롭힘 가해자가 '후임'이라는 응답은 2016년 2.7%에서 6년만인 지난해 11.7%까지 치솟았다. 괴롭힘 열 건 중 한 건은 후임이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업장 내 갑질은 윗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관념 자체가 깨지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실제 '을질'은 조사된 것보다 많을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서 연구원은 "직장 내 괴롭힘은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을질 피해자들은 신고조차 할 수 없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회사가 '을질'을 괴롭힘 보다는 상사의 무능함으로 치부하는 것도 문제다.

F 부서장은 임신 중인 부서원 G에 여러 차례 여러 가지 과도한 배려를 요구한 탓에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법으로 보장된 단축 근무 기간이 지나서도 계속 단축근무를 하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F가 인사부서에 확인해 본 결과, 이미 안정기라 단축근무를 허용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G는 부서장이 임신한 부서원도 배려해주지 않는다며 화를 냈다. 이후 G는 승인받지 않은 채 제멋대로 단축근무를 계속했다. 지적해도 G는 "임산부 배려도 모르냐"고 맞섰다. 회사서 문제가 되자, F가 허용해 준 것이라고 거짓말까지 했다. 그로 인해 F는 상사에게 질책을 당했다. 자기는 허용해 주지 않았다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상사는 "부서원 관리도 못한다"며 F를 더욱 질책했다.

서 연구원은 "사측은 을질 피해자를 ‘후임에게 만만히 보이는 무능력자’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현상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을질 가해율'이 14.4%에 달했고 호주는 을질 피해율이 25%에 달한다. 사람 사는 곳이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도 상사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 퍼뜨리기, 반복적인 지각 및 결근, 상습 업무 지체 등이 주요 사례로 꼽혔다. 호주도 허위 갑질 신고, 상사의 권한 무시, 업무 방치 등이 횡행했다.

이런 장난을 빙자한 괴롭힘은 여성이나 나이 어린 상사 등 특정 타깃을 노린 경우가 많다.

중년의 여직원 E씨는 조카뻘인 신입 남직원으로부터 애정 고백을 받고 며칠간 잠도 자지 못하며 고민했다. 남직원을 걱정하는 마음이 앞선 E는 고민 끝에 남직원을 불러 잘 타이르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남직원은 “장난이었는데 너무 심각하세요”라며 비웃었다. 그 남직원은 친구와 취업을 자축하며 회사 여직원에게 먼저 고백하는 내기를 했다는 것이다. 젊은 여직원에게 하면 진짜로 믿거나 성희롱이라고 생각할 테고, 중년인 피해자에게 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서유정 연구원은 "을질 가해자들은 젊은 상사·선임, 여성 등 만만한 타깃을 노린다"며 "허위신고는 명백히 누명을 씌우는 유형의 괴롭힘이지만 가해자가 피해자 행세를 하기 때문에 진짜 피해자는 구제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오효진 법률사무소 리연 변호사는 "직장 내 괴롭힘은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한 행위’로 국한되어 있어서 ‘을질’ 피해를 당하더라도 구제를 받기가 쉽지 않아 입법적 보완이 시급하다"며 "기업 내부에서 을질을 직장질서 위반 행위로 적극 제재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