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증하는 '계약갱신권' 분쟁…대법원 판례 살펴봤더니 화들짝
김한경(가명) 씨는 인천 연수구의 한 아파트를 11억원에 매수하기로 계약하고 매도인에게 중도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아파트에 거주하는 세입자가 약속과 달리 임대차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하겠다"고 하면서 매매 계약에 차질이 생겼다. 매수한 아파트에 실거주할 계획이었던 김 씨는 세입자의 아파트 인도 거부를 이유로 잔금 지급을 거부했다. 이에 매도인은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이 사건은 결국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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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갱신청구권은 임차인이 계약이 끝나기 6개월 전부터 2개월 전까지 1회에 한해 임대차 계약을 연장할 수 있는 제도다. 임대료 인상률은 5% 이내로 제한된다. 부동산 가격 급등기에 세입자의 주거 안정을 돕는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하지만 계약갱신청구권을 둘러싼 갈등도 끊이질 않고 있다.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에 따르면 2019년 49건이던 계약갱신·종료 관련 분쟁 접수는 제도가 시행된 2020년 154건, 이듬해 307건으로 급증했다. 조정해 실패해 법정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집 못 뺀다” 말 바꾼 세입자 … 잔금지급 거부 정당

김 씨는 아파트 매매 계약 해지를 통보한 매도인을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 소송(사건번호: 대법원 2023다269139)을 걸어 1심에서 승소했다. 1심 재판부는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했다 하더라도 피고의 인도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며 "원고로서는 인도 의무를 이행 받을 수 있는지 현저히 불확실한 이상 반대급부인 잔금 지급 의무의 이행을 거절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2심 판단은 달랐다. 항소심 재판부는 "원고가 피고의 임차인에 대한 임대차보증금반환채무를 승계하기로 했으므로 임대차계약에 따른 점유매개관계를 원고가 인수함으로써 인도 의무가 이행된 것"이라고 봤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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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김 씨의 손을 들어줬다. 상고심 재판부는 "피고의 현실인도의무의 이행이 곤란할 현저한 사정변경이 생겼다고 볼 수 있고, 이에 따라 당초의 계약 내용에 따른 원고의 선이행의무를 이행하게 하는 것이 공평과 신의칙에 반하게 됐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매수인의 잔금 지급 의무 이행거절이 정당하다면 잔금 지급 의무 불이행을 이유로 매도인이 매매계약을 해제하는 것은 위법하다는 게 사법부 판단이다.

갱신권 거부 사유 ‘실거주’ 집주인이 증명해야

집주인이 계약갱신청구를 거절할 수 있는 예외 조건도 있다. ‘직계 존비속을 포함한 임대인이 주택에 실제 거주하려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실거주 기준을 두고 집주인과 세입자가 갈등을 빚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서울 서초구의 아파트를 임대한 박한경(가명) 씨는 세입자를 상대로 제기한 건물 인도 청구 소송(사건번호: 대법원 2022다279795)에서 최종 패소했다. 박 씨의 세입자는 임대 계약 기간 만료를 약 3개월 앞두고 “계약갱신을 청구한다”는 내용증명을 보냈는데, 박 씨는 “계약 만료 후 아파트에 실거주할 계획”이라며 거절했다. 이후 박 씨는 "실거주를 이유로 계약갱신청구를 거절한 것은 정당하다"며 세입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2심 재판부는 박 씨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대법원은 박 씨가 실제 거주자에 대해 말을 바꾸는 등 실거주 의사가 진실하다는 증명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실제 거주하려는 의사’의 존재는 임대인이 단순히 그런 의사를 표명했다고 해 곧바로 인정될 수는 없다”며 “통상적으로 수긍할 수 있을 정도의 사정이 인정돼야 한다”는 법리를 처음 제시했다.

법인의 갱신권 행사는 ‘직원’ 거주 때만

중소기업기본법에서 정한 중소기업 법인이 소속 직원의 주거용으로 주택을 임차한 경우도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한 대법원 판례도 최근 나와 관심을 끌었다.

대법원은 부동산 임대업체 A사가 중소기업 B사를 상대로 제기한 건물 인도 소송(사건번호: 대법원 2023다226866)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최근 확정했다. A사는 B사와 서울 용산구 소재 아파트를 보증금 2억원, 월세 1500만원 조건으로 계약했다. 실거주자는 당시 B사의 대표이사였다.

B사는 계약 기간 만료를 앞두고 "중소기업으로서 주택임대차보호법에서 정한 대항력을 갖춘 임대인"이라며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했다. A사는 "직원이 아닌 대표이사 등 임원이 거주한 경우라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심은 "임원도 직원에 포함된다"며 원고 패소로 판단했다. 하지만 2심 판단은 달랐다. 항소심 재판부는 "영세한 중소기업이 복지 차원에서 소속 직원의 주거 안정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한 취지 등을 고려하면 위 조항에 규정된 '직원'에 대표이사 등 임원들까지 포함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2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보고 그대로 확정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