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턴테이블 없어도"…요즘 LP 사는 이유 물었더니
지난 1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 콘퍼런스룸E 앞에서 시작된 줄은 코너를 돌아 길게 이어졌다.

국내 최대 규모 LP 축제인 '제12회 서울레코드 페어'에 들어가려고 대기하는 행렬이었다.

오전 11시 입장이 시작되자 행사장은 이내 시끌벅적해졌다.

한쪽에선 한정판을 손에 넣기 위해 별도의 번호표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올해는 1960∼70년대 인기 가수 김상희의 LP 2종과 밴드 산울림의 동요 전집 등이 재발매돼 처음으로 음악 팬들에게 소개됐다.

장기하, 머드 더 스튜던트, 제이클레프, 다브다 등은 여기서만 구입할 수 있는 한정판 LP를 내놔 관심을 모았다.

회사원 김모(52) 씨는 "학생일 땐 LP는 엄두가 안 나 불법 복제된 '빽판'을 주로 구매했는데 이제 경제적 여유가 생겨 하나둘씩 LP를 사 모으고 있다"고 했다.

평소엔 서울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보물찾기'를 즐긴다는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주려고 쳇 베이커, 나를 위해 비틀스 음반을 샀다"고 털어놨다.

'바이닐'이라고도 불리는 LP는 한때 음반시장 주류였지만 1990년대 CD와 MP3가 등장하며 국내 생산이 사실상 중단됐다.

그러다 2010년대 중반 음악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와 함께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반을 찾는 이른바 '디깅'(Digging)이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아날로그 문화의 향수를 자극하는 '뉴트로' 열풍도 한몫했고, 여기에 코로나19 특수까지 겹치면서 LP 시장은 제2의 전성기로 접어들었다.

미국레코드산업협회(RIAA) 보고서를 보면 미국 내 LP 판매량은 지난 2006년 이후 16년 연속 증가하며 지난해 12억 달러, 우리 돈 약 1조5천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는 전체 음반 매출의 71%에 해당하는 수준.
특히 LP 판매량은 약 4천130만장으로, 1987년 이후 처음 CD 판매량(3천340만장)을 앞질렀다.

[K-VIBE] "턴테이블 없어도"…요즘 LP 사는 이유 물었더니
서울레코드페어 역시 지난 2011년 2천여명에 불과했던 방문객 수가 2020년에는 2만 5천명으로 늘었고 올해도 1만5천명을 기록했다.

뚜렷한 LP 판매 관련 통계는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한국 LP 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는 게 주최 측의 설명. 마장뮤직앤픽처스 바이널팩토리처럼 LP 제작을 재개한 업체들도 생겨났다.

이 같은 흐름은 젊은층이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 YES24에서 전체 LP 구매자의 39.9%를 차지했던 20∼30대 비중은 올해 11월 기준 43.3%로 매년 증가세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지금의 2030을 일컫는 MZ세대만의 특징으로 규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서울레코드 페어를 운영하는 김영혁 김밥레코즈 대표는 "과거에도 음반시장은 2030이 이끌어왔다"며 "20∼30대는 시대를 초월해 문화 전반에 관심이 가장 많은 나이기에, 음악을 찾아듣고 LP도 구입한다"고 강조했다.

신구세대 간 LP 소비에 차이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 씨는 "요즘 세대는 '힙하다'고 간주되는 LP 구매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표현하길 원하며 고전 명반보다는 최신 음반에 집중한다"고 분석했다.

일부 팬들 사이에서 LP는 음악 감상 수단이 아닌 '소장용 굿즈'로 자리 잡고 있다.

블랙핑크 정규 2집 '본 핑크', BTS 멤버 제이홉의 첫 솔로 앨범 '잭 인 더 박스' 등은 LP에 포토카드, 엽서, 포스터까지 더해져 '종합선물세트'를 연상케 한다.

보통 5만원 이상 가격대에 한정 발매되는 이들 제품은 중고 시장에서 리셀러 손을 거쳐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는 일도 다반사다.

재발매 직전 정가(4만4천원)의 100배가 넘는 400만원까지 치솟았던 아이유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가 대표적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희소성 있는 앨범을 확보하는 것이 차별화된 팬덤의 지표로 여겨지기도 한다.

[K-VIBE] "턴테이블 없어도"…요즘 LP 사는 이유 물었더니
LP의 크기와 모양, 색상, 디자인이 다양해지는 것 또한 시각적 요소를 중시하는 MZ세대의 성향과 맞닿아있다.

지난 3월 나온 걸그룹 트와이스 '레디 투 비' LP의 경우 반투명으로 첫선을 보인 이후, 커버와 속지는 물론 음반에 부착된 레이블마저 다른 색상으로 재출시됐다.

지난해 LP만 57만장 이상 팔아치운 테일러 스위프트의 '미드나잇츠'는 아예 5가지 버전의 색깔로 출시됐다.

친환경을 중시하는 MZ세대 기호에 맞춰 100% 재활용 소재로 만들어진 LP도 개발됐다.

[K-VIBE] "턴테이블 없어도"…요즘 LP 사는 이유 물었더니
턴테이블 없이 LP 수집에 동참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 4월 북미 음악시장 분석업체 루미네이트 리포트에 따르면 최근 1년간 미국 LP 소비자 중 절반은 플레이어 미보유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레코드페어에서 만난 직장인 이모(32) 씨는 "턴테이블을 들여놓는다면 괜찮은 물건을 갖고 싶은데 가격이 부담되고 공간도 차지해 고민 중"이라며 "일단 LP를 인테리어 소품으로 벽에 걸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러한 추세가 전체 음반업계에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라는 지적도 있다.

엔데믹을 계기로 한동안 과열됐던 시장의 거품이 빠지는 과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최규성 씨는 "일선 매장의 매출이 팬데믹 시기에 비해 삼분의 일로 쪼그라들었다"며 "서울레코드 페어 내방객 80∼90%가 2030이지만 이들이 지갑을 열기에 LP값이 절대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김영혁 대표도 "40대 이상 중장년층이 LP를 사지 않는다면, 이 시장은 2천년대 초반처럼 또 한 번 어려워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