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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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각자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기호품인데도, 모두가 인정하는 '서열'이 있다. 맨 꼭대기는 언제나 스위스 브랜드 파텍필립 차지다. 아무리 혁신적인 제품을 내놔도, 아무리 판매량이 많아도 브레게나 롤렉스가 파텍필립 자리를 넘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명품 악기는 어떨까. 피아노 세계에도 암묵적인 서열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가정집이 아닌 콘서트홀 무대에 오르는 피아노는 스타인웨이, 뵈젠도르퍼, 시게루 가와이 등 셋 중 하나다. 연주자들이 꼽는 소리의 질감이나 판매가격 등으로 보면 이들 '빅3'가 피아노 서열의 맨 꼭대기에 있다. 판매량은 스타인웨이가 월등하지만, 평판으로만 따지면 시계의 파텍필립 같은 압도적인 1위는 없다.

전문가들은 "시계는 액세서리 성격이 크지만 악기는 각 연주자와 함께 호흡하는 음악 파트너에 가깝다"며 "그런 만큼 연주자마다 자신의 연주 스타일과 '궁합'이 맞는 피아노를 찾을 뿐 모든 피아니스트가 찾는 1위 브랜드란 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찾아봤다. 올 하반기 내한했거나 내한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은 어떤 브랜드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지. 그리고 왜 하필 그 피아노를 택했는 지.

○완벽주의자의 선택, 최고 인기 스타인웨이

크리스티안 짐머만 (c)Bartek Barczyk
크리스티안 짐머만 (c)Bartek Barczyk
내달 27일부터 부산, 대전, 서울 등에서 내한 공연을 여는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짐머만(66)의 별명은 '믿고 듣는 짐머만'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관객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보니, 이런 수식어가 붙었다.

그런 그의 곁엔 언제나 '스타인웨이 앤드 선스'(스타인웨이)사의 피아노가 있다. 이번 공연에서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고 말할 정도로 스타인웨이 피아노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스타인웨이를 사랑하는 피아니스튼 짐머만 뿐이 아니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같은 20세기 거장부터 에브게니 키신, 미츠다 우치코, 김선욱, 조성진 등이 음악 파트너로 스타인웨이를 '찜'했다. 스타인웨이 국내 공식 수입사인 코스모스악기 관계자는 "스타인웨이는 전세계 콘서트용 피아노의 98% 가량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스타인웨이를 만든 사람은 독일 출신 '피아노 장인' 스타인웨이와 그의 아들들(sons)이다. 1853년 뉴욕에 회사를 설립해 반세기 넘게 피아노를 만들었다. 이들은 '오버 스트링스'(저음현을 중음의 위쪽으로 교차시키는 방법)로 대표되는 '스타인웨이 시스템'을 비롯해 128개 기술을 앞세워 피아노 시장의 선두주자가 됐다. 스타인웨이는 반짝이는 고음과 투명하면서도 풍성한 사운드로 점차 시장을 평정했다.

스타인웨이를 찬는 연주자들은 이 피아노가 다른 제품보다 민감하다는 걸 이유로 꼽는다. 한음 한음 전달력이 높고, 연주자의 의도를 세심하게 반영한다는 것. 그래서 섬세하고 절제된 연주가 특징인 짐머만은 스타인웨이의 청명한 소리와 궁합이 맞는다. 특히 그는 '쇼팽 스페셜리스르'로 유명한데, 쇼팽의 섬세하고 우아한 음악은 민감도가 높은 스타인웨이와 잘 어울린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스타인웨이의 콘서트용 그랜드 피아노 모델(D-274)은 4억원에 달한다.

○빈 사운드 전통계승...뵈젠도르퍼

지난 10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안드라스 쉬프 내한 리사이틀. 마스트미디어
지난 10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안드라스 쉬프 내한 리사이틀. 마스트미디어
스타인웨이가 잘 나간다고, 모든 거장 피아니스트들이 같은 피아노를 치는 건 아니다. 헝가리 태생의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70)는 뵈젠도르퍼를 애용한다. 쉬프는 일반적인 연주자들보다 자신이 연주하게 될 피아노의 상태에 민감한 걸로 잘 알려져 있다. 해외 공연 때마다 전속 조율사를 대동할 정도니, 말 다했다. 뵈젠도르퍼는 이런 '까다로운 남자' 쉬프가 낙점한 피아노다. 지난 10월 내한 공연 때도, 작년 내한 공연 때도 함께 했다.

이그나츠 뵈젠도르퍼가 182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든 뵈젠도르퍼는 클래식 피아노의 원조격이다. 뵈젠도르퍼 공식 수입사인 야마하코리아의 신형준 사업팀장은 "오스트리아에서 18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는 피아노 제작사는 뵈젠도르퍼가 거의 유일하다"며 "클래식의 본류인 빈의 사운드를 재현하는 것이 이들의 철학"이라고 설명했다.

뵈젠도르퍼는 따뜻하고 담백한 음색이 특징이다. '시적인 사운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반짝이는 스타인웨이와는 결이 다르다. 그래서 모차르트나 초기 베토벤 등 이른바 17~18세기 빈이 주축이 된 고전주의 시대 음악을 재현하는 데 적절하다는 평가가 많다. 쉬프는 바흐, 모차르트 등 고전주의 레퍼토리에 강점을 보이는 연주자다.

손열음도 지난 5월 모차르트 소나타 전곡 투어에서 일부 곡을 뵈젠도르퍼로 연주했다. 20세기 명 피아니스트 빌헬름 바크하우스, 프리드리히 굴다 등도 이 악기를 애용했고, 국내에서는 정명훈이 이 피아노를 즐겨 사용했다. 캐나다 출신 재즈 피아니스트 오스카 피터슨의 뵈젠도르퍼 사랑도 유명하다.

뵈젠도르퍼는 수제로 생산한다. 그래서 플래그십 모델인 '280vc' 생산량은 많아야 1년에 300대다. 목재 선정부터 마감 디자인까지 오스트리아 장인들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온다. 최근 서울 장충동에 지어진 신세계 남산 트리니티홀에도 뵈젠도르퍼가 구비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판매 가격은 대략 3억 원 후반대.

○피아노에 질린 피아니스트의 선택, 시게루 가와이

지난 9월 내한 공연을 가진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미하일 플레트네프(66)는 또 다른 명품 피아노 브랜드인 시게루 가와이를 애용하는 대표 아티스트다. 시게루 가와이는 일본의 피아노 제조사 가와이사의 핸드 메이드 라인이다.

플레트네프와 시게루 가와이 사이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2006년 "현대 피아노의 음색에 한계를 느꼈다"며 활동 중단을 선언한 플레트네프가 6년 뒤 시게루 가와이와 함께 돌아왔기 때문이다. 시게루 가와이 특유의 음색에 매료돼 6년간 외면했던 피아노 건반을 다시 두드리게 됐다는 얘기다.
미하일 플레트네프. (c)Jury Rukosuev
미하일 플레트네프. (c)Jury Rukosuev
플레트네프는 지난 9월 내한 공연에서 시게루 가와이 피아노로 '올(all) 쇼팽'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는 "마치 시게루 가와이 피아노가 플레트네프를 고른 것처럼 둘 사이의 조합이 딱 맞아 떨어졌다"고 평했다.

시게루 가와이는 약간은 무거운 터치감과 다채로운 음색이 특징이다. 콘서트용 모델(SK-EX)은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사운드 보드, 그들만의 기술이 담긴 키보드 액션(건반에 가해진 힘을 전달해 현을 진동시키는 연동 장치)으로 민감도가 높다.

작년 6월 일본에서 열린 센다이 국제 콩쿠르 결선에서는 결선 진출자 6명 전원이 시게루 가와이 SK-EX 풀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를 사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격은 풀 사이즈 콘서트용 모델 기준 2억원대 중후반 가량이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