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토로와 빌리

항상 똑 같은 영화의 똑 같은 장면에서 울음을 참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나 볼 것 같은 <이웃집 토토로(1988)>를 여러 번 보면서도 매번 울컥함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다름 아닌 옥수수 장면 때문입니다. 주인공 사츠키와 메이가 병원에 입원 중인 엄마를 위해 고양이버스도 타고 우여곡절 끝에 옥수수 전달에 성공하는데, 엄마는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의아해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옥수수 장면. 껍질에 비뚤배뚤한 글씨로 ‘엄마에게’라고 써놓았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그것을 자세히 비춥니다. 그 장면이 왜 그리도 감동적이고 기특한지 사츠키와 메이는 훌쩍 자라 이미 어른이 되어 있을 것 같은데, 말없이 안아주고 싶어집니다. 여기에 히사이시 조가 작곡한 <이웃집 토토로>의 배경음악 ‘바람이 지나는 길’까지 들으면 여지없이 여름 저녁의 습한 바람과 자매의 모험이 떠올라 뭉클합니다.
이웃집 토토로
이웃집 토토로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스티븐 달드리의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0)>에는 유독 그런 장면이 많습니다. 땔감이 없어 어머니의 유품인 피아노를 부수고, 빌리가 아버지 앞에서 권투 대신 춤을 추며 재능을 보일 때는 물론이고 특정 장면에선 눈물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빌리가 왕립발레학교 입학시험장에서 춤출 때의 느낌을 묘사하며 “모든 게 사라져 버리죠”라고 말할 때, 혼자서 방문을 잠그고 한참 동안 가족들의 마음을 졸이게 하다가“합격했어요”라고 말할 때가 그렇습니다.

눈물 날 것이 예상되어 괜히 자리를 옮기거나 딴 생각을 해보지만, 참는 일이 참 쉽지 않습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 3 (2010)>의 일부 장면들도 볼 때마다 눈시울을 붉힙니다. 어른이 된 인간 주인공 앤디와 장난감 친구들의 근사한 이별 장면은 물론이고, 버즈·우디·제시 등 장난감들이 쓰레기 소각장서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가 항상 감동을 줍니다.

용광로 방향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면서 더 이상 아무 희망도 품을 수 없게 된 순간, 장난감들은 말없이 서로의 손을 잡으며 눈을 질끈 감습니다. 비록 장난감에 불과하지만 최후의 순간을 대하는 자세가 어찌나 초연한지, 왠지 저도 옆에 앉은 아이들의 손을 꽉 쥐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 어머니와 어머니

이른 바 ‘신파(新派, 감정이 과잉되거나 수용자에게 지정된 감정을 강요하는 문화예술)’로 분류되어 작정하고 관객이나 독자를 울리는 영화와 책도 많습니다만, 주인공이 시종일관 명랑하거나 시큰둥하다가 어떤 순간 ‘각성’할 때야말로 잔잔했던 울림이 극대화됩니다.

제게는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접했던 세 가지 작품이 그랬습니다. 바로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픽사 애니메이션 <루카>, 안토니오 타부키의 <페레이라가 주장하다>입니다. 주인공들이 각성하는 순간에 저도 모르게 울먹였습니다.

<어머니>속의 어머니 닐로브나가 사회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전형적인 약자의 모습을 보였다가 아들 빠벨 블라소프가 위기에 처하자 혁명가로 거듭날 때 두근거렸습니다. ‘혁명’이어서가 아니라 ‘각성’했기 때문이죠. 어쩌면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하고 부르면, 1980년대 전후 야만의 시대에 ‘좋은 빛의 도시 광주’와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좋은 공기의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떠오릅니다.

두 도시는 우연하게도 나란히 군부 독재 권력에 의해 많은 민중이 희생당한 곳입니다.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으며, 당시 서슬 퍼런 신군부에 정면으로 맞섰던 ‘오월어머니회’와 ‘5월 광장의 어머니회’에 관한 기억이 교차했습니다. (빛고을 광주(光州)는 ‘좋은 빛’,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는 ‘좋은 공기’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임흥순 감독의 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2021)> 에서도 묘사됩니다)
좋은 빛, 좋은 공기(2021) 스틸컷
좋은 빛, 좋은 공기(2021) 스틸컷
인어(人魚)에 관한 전설을 차용한 애니메이션 <루카(2021)>에도 순수하고 마음 약하지만 결국엔 각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탈리아의 친퀘 테레(Cinque Terre)를 참고해 그렸다는 영화 속 작은 바닷가 마을에는 주민들과 바다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까지, 마을사람들과 바다 생명체는 생김새가 다른 서로를 향해 ‘괴물’이라고 간주하며 공존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으로 몰아갑니다. 여기에 더해 파시스트에 가까운 작은 악당이 등장하는데, 동년배 집단에서 조금 힘이 세고 키가 큰 친구 하나가 작고 힘이 없는 주인공에게 위협을 가합니다. ‘타자에 대한 이해’를 교훈으로 남기는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두 번의 큰 각성을 거칩니다.

남다른 외모를 숨겨야만 했던 주인공 루카와 알베르토가 큰 용기를 내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낼 때, 같은 편에 선 또 다른 주인공 줄리아가 꿈꿔왔던 자전거 대회 우승을 포기해가며 권위주의에 맨몸으로 맞설 때 (비록 영화 속 어린이들이지만) 눈물을 참지 못했습니다. 특히 루카가 각성하며 눈빛이 변할 때 함께 떨렸습니다.

장(章)이 끝날 때마다 ‘~라고 페레이라는 주장한다’로 문장을 닫는 안토니오 타부키의 독특한 소설 <페레이라가 주장하다> 속에도 각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페레이라는 가족을 잃은 슬픔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며 줄곧 세상과 단절된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포르투갈 살라자르 독재 정권을 향해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마음이 조금씩 변하는데, 은신처까지 제공해가며 교감하던 동료가 희생되면서 마침내 페레이라는 ‘각성’합니다.

페레이라는 독재 정권의 폭압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 위해 본인의 직업적 특성을 살려 신문을 통해 기꺼이 진실을 알리기로 결심합니다. 아마도 지금까지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큰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그 순간 저도 따라서 울림을 느꼈습니다.
페레이라가 주장하다
페레이라가 주장하다

○ 숭고함을 경험하는 장소

시인 윤동주, 화가 빈센트 반 고흐부터 독립운동가, 천주교 박해에 희생된 순교자까지, 세상을 살다 간 숭고한 인물들의 삶을 떠올리면 언제든 감정이 벅차오릅니다. 가장 도시적인 장소에서 누구보다 세속적인 삶을 사는 직장인이기에 더욱 그러한 마음이 생기나 봅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깨달을 일이라고 해봐야 대단치 않지만 종종 서소문성지역사공원, 윤동주문학관 등 숭고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위로를 얻습니다.

어쩌면 울어내기 위해 일부러 방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살아가다보면 속상함 때문에 울 일이 참 많은데, 하물며 감동의 눈물이라면 얼마든지 흘려도 되지 않을까요? ‘모든 근심을 떨치기 위해 모든 장소를 한꺼번에(Everything·Everywhere·All at once)’ 가볼 수는 없을지라도 마음 푹 놓고 감동할 수 있는 계절을 기다려봅니다.
절두산 성지
절두산 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