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질문 없는 사회는 혁신이 없다
“나의 임무는 대통령의 얘기를 과학계에 전하는 게 아니라 과학계의 얘기를 대통령에게 전하는 것이다.” 빌 클린턴 미국 행정부 때 대통령 과학기술 보좌관 겸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장으로 활동한 존 기번스 핵물리학자의 말이다. 한국에서 현장의 얘기를 대통령에게 제대로 전하는 장관이나 비서관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다. 메신저 로봇은 대통령을 위험하게 한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현대 사회에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분류한 바 있다. 누군가의 대리인으로 말하는 예언자, 침묵으로 때우는 현자(賢者), 오로지 승인된 것만 말하는 교육자로는 불확실성 시대를 돌파할 수 없다. 대리인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침묵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권력과 대립하는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진실을 말하고 질문을 던지는 파레시아스트는 왜 안 보일까. 사회의 경계나 밖에 위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파레시아스트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퇴보를 알리는 위험 신호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개인·기업·국가가 던져야 할 질문이 많다. 과학기술뿐 아니라 법과 제도, 정치는 물론이고 비즈니스 지형을 완전히 바꾸는 질문이 쏟아져도 부족할 지경이다. 되돌아보면 18세기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전개되기까지 벌어진 일련의 과정이 의미심장하다. ‘철학혁명→과학혁명→정치혁명→기술혁명→산업혁명’의 순서였다. 철학·과학혁명이 무엇인가. ‘지(知)의 해방’을 가져온 질문의 역사 그 자체다.

서울대가 ’SNU 그랜드 퀘스트 오픈 포럼’을 열었다. 기존 로드맵을 벗어나는 근본적 사고 전환을 요구한다는 질문들이 제시됐다. 지식과 무지의 깨달음이 비례한다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대로다. 지식이 많을수록 더 많은 질문이 생긴다. 선진국에서 대학이 세상을 바꾸는 플랫폼인 이유다. 제약 없는 질문이 혁신 생태계다.

서울대가 지금이라도 질문을 들고나온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한국 사회를 위해 다행이지만, 갈 길이 멀다. 서울대가 던진 10대 질문 중 AI와 관련된 것이 대다수다. 시대의 반영이겠지만 그중엔 기존의 로드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질문도 엿보인다. 한국의 연구 환경에서 오는 제약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당장의 용도와 목적, 시장이 분명하지 않은 질문은 연구비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질문이 기존의 경로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다. 근본적 사고 전환을 요구하는 질문은 그런 질문을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조성할 것이냐는 또 다른 난해한 질문으로 이어져야 하기에,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용도와 목적, 시장이 명확한 질문은 그 틀에 갇혀 혁신이 제약당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반대로 너무 모호해도 혁신의 동기가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세상은 그 중간인 ‘그레이존’이다. 그 맥락에서 보면 ‘왜 지금 그런 질문을?’이 숨 쉴 수 있는 연구 공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말이 된다. 지금은 명확히 말할 수 없지만 뭔가 있다는 직감이 밀려오는 질문, 언젠가는 ‘진·선·미(眞·善·美)’가 될 것 같은 연구 말이다.

사람을 달에 보내겠다는 아폴로 계획에 활용된 기술이 인류가 전혀 몰랐던 용도와 목적, 시장을 창출해낸 경우는 부지기수다.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말한 ‘브리콜라주’도 같은 맥락이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인류를 구한 것도 당장의 용도와 목적, 시장이 불명한데도 어디선가 해온 연구였다. ‘예정 조화설’보다 ‘비(非)예정 조화설’의 손을 들어주는 혁신이 많다. 불확실하고 복잡한 시대는 질문이 많을수록 좋다.

철학혁명이 산업혁명에 선행한 데는 필연성 같은 게 잡힌다. 서울대가 던진 그랜드 퀘스트와 연구개발 예산에 칼을 들이댄 정부의 ‘효율성(efficiency)’ 논리는 철학적 충돌이 불가피하다. 임팩트, 즉 ‘효과성(effectiveness)’이 아니라 당장의 효율성에 가치를 두는 국가에서 세상을 바꾸는 질문은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시장의 논리상 그랜드 퀘스트를 던지기 어렵다. 그렇다고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부도 기업도 아닌, 미국의 하워드휴스 의학연구소 같은 곳이 많이 생긴다면 한국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대학이 세상을 바꾸는 질문을 던지고 민간 비영리 연구펀드가 그런 질문을 지원하는, 지금까지 없던 혁신 생태계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