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 앞세운 교황청 설득해 韓 조각가 관철…"한국인 성인상, 한국 작가가 맡아야"
성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아시아인으로는 첫 설치…"수도회 설립자 관례도 깨뜨려"
[인터뷰] 유흥식 추기경 "김대건 신부, 이제는 전 세계의 성인으로 우뚝"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인 유흥식 추기경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 김대건 신부 성상을 모시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보며 "이렇게 어려운 줄 알았으면 시작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쉽지 않은 과업이었다.

유 추기경이 김대건 신부 성상 설치 기념 미사와 축복식을 하루 앞둔 15일(현지시간) 그가 장관으로 있는 바티칸 교황청 성직자부에서 한국 취재진과 만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줬다.

유 추기경은 2021년 8월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부임한 지 며칠 뒤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난 자리에서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성상을 모시는 자리 중 빈 곳에 김대건 신부의 성상을 모시게 해달라"고 청했다.

유 추기경이 지목한 곳은 프란치스코, 도미니코 성인 등 유럽 수도회 설립자들의 성상 옆에 딱 한 자리만 비어 있는 곳이었다.

유 추기경이 그 자리를 눈여겨본 뒤 요청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를 허락함으로써 한국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 들어서게 됐다.

교황의 허락은 얻었지만, 다음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 베드로 대성전을 총괄하는 마우로 감베티 추기경은 성상과 관련해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주변의 성상과 분위기가 어울려야 하고 대리석 색깔도 같아야 하며, 검증된 조각가에게 작업을 맡겨야 한다고 했다.

감베티 추기경은 공모를 통해 조각가를 선정해야 한다며 그게 규정이라고 말했지만 유 추기경은 여러 제약 조건을 따졌을 때 이탈리아 작가가 선정될 게 뻔했기에 반대하고 나섰다.

유 추기경은 "한국인 성인상을 한국 작가가 아니라 이탈리아 작가가 조각한다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섰다.

[인터뷰] 유흥식 추기경 "김대건 신부, 이제는 전 세계의 성인으로 우뚝"
결국 유 추기경의 뜻이 관철됐다.

국내 대표적인 돌 조각가인 한진섭 작가가 김대건 신부 성상 제작자로 선정됐다.

한 작가는 지난해 8월부터 5개월에 걸쳐 이탈리아 카라라 지역에서 양질의 대리석을 찾아낸 뒤 지난 1월부터 이탈리아 서북부 도시 피에트라 산타에 머무르며 김대건 신부 조각상을 제작했다.

유 추기경은 지난 5월 6일 직접 작업 현장을 방문해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8개월여에 걸친 작업 끝에 제작이 완료됐고, 조각상은 피에트라 산타에서 400여㎞ 떨어진 바티칸까지 손상 없이 운반돼 지난 5일 설치 작업이 무사히 완료됐다.

성상에 담긴 김대건 신부는 갓과 도포 등 한국 전통의상을 입고 두 팔을 벌려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유 추기경의 뜻대로 김대건 신부 성상은 다른 유럽 수도회 설립자들의 성상과는 달리 한국적 이미지가 고스란히 담겼다.

유 추기경은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 설치됐다"며 "또한 지금까지는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수도회를 설립한 성인, 성녀만 모셨는데 이번에 그 관례가 깨졌다"고 말했다.

그는 "저로서는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하느님이 이끌어주셨다는 점을 강하게 체험했다"고 덧붙였다.

충남 논산 출신인 유 추기경은 대건중·고교를 다녔고, 고교 1학년 때 세례를 받았다.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딴 학교, 가톨릭과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는 1979년 사제품을 받은 뒤 2003년 주교로 서품됐다.

2021년 6월 한국인 최초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임명돼 화제를 모았고 지난해 8월 한국인 네 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중·고교에서 김대건 신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본받게 된 유 추기경은 김대건 신부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김대건 신부가 2021년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고, 200주년을 기리기 위한 영화 '탄생'이 제작돼 지난해 11월 교황청 시사회가 열리기까지 그 뒤에는 유 추기경이 있었다.

[인터뷰] 유흥식 추기경 "김대건 신부, 이제는 전 세계의 성인으로 우뚝"
유 추기경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과의 일화도 처음으로 소개했다.

그는 "주교 임명을 받은 뒤 김수환 추기경에게 인사드리러 갔는데, 김 추기경께서 '김대건 신부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님이지만 충청도 최초의 신부님이기도 합니다.

주교님도 충청도 최초의 주교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김대건 신부 성상 설치 기념 미사와 축복식은 16일 오후 3시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다.

기념 미사와 축복식에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와 전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전 군종교구장 유수일 주교, 군종교구장 서상범 주교, 청주교구장 김종강 주교, 부산교구 신호철 주교가 참석할 예정이다.

또 강승규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이 특사로 파견돼 교황청이 한국에 보여준 관심과 애정에 감사 인사를 전할 계획이다.

축복식이 열리는 16일 오전에는 한국 주교단들과 함께 공식 순례단과 평신도, 수도자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특별 알현한다.

유 추기경은 "김대건 신부의 삶을 돌아보면 대단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서품받은 사제이자 순교자이며 첫 유학생으로, 짧고 굵은 삶을 사셨던 분"이라며 "이제 더는 한국의 김대건 신부가 아니라 전 세계의 김대건 신부로 우뚝 서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용기와 기백, 세심함, 가난한 이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은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유흥식 추기경 "김대건 신부, 이제는 전 세계의 성인으로 우뚝"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