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유값 유독 많이 뛴 이유…또 러시아·사우디 때문 [원자재 이슈탐구]
중동 원유 맞춰 설비 세팅한 유럽 정유사 낭패
항공유 수요 가파르게 늘자 경유 생산은 뒷전
한국, 올겨울 경유값 휘발유 또 앞지르나


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 가격이 지난주 배럴당 90달러를 돌파한 가운데 경유 가격이 유독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휘발유 값도 오르긴 했지만 원유 오름폭과 비슷한 정도다. 경유값 상승은 트럭 운송 비용과 버스 등 대중교통 원가를 비롯해 공업·농업용 기계류의 유류비 부담 등으로 이어지면서 소비자 물가를 밀어 올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미국과 유럽에서 두드러지고, 한국도 최근 몇 년 사이 경유값이 휘발유 가격을 넘어서는 등 정도는 덜하지만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친환경 저탄소 에너지 전환으로 디젤엔진 버스가 전기 버스로 바뀌는 등 수요가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경유값이 치솟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 각 지역 유전에서 생산되는 원유의 특징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유전의 원유는 비슷한 특성을 가졌는데, 이들이 담합으로 생산을 줄이고 있어 글로벌 수요와 공급에 불균형이 발생하고 경유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넉 달 만에 40% 오른 美 경유 가격

월스트리트저널(WSJ) 최근 아르거스 데이터의 자료를 인용해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비(非)OPEC 주요 산유국 협의체인 OPEC+이 기습 감산을 단행한 5월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디젤 가격이 40% 이상 상승했다고 보도했다. 같은 기간 각각 13%, 14%씩 오른 북해 브렌트유와 WTI 원유 선물과 비교하면 오름폭이 세 배가량이다. 미국의 경우 8월 무연 휘발유 전국 평균 가격은 갤런(3.78L)당 7센트(약 93원) 상승한 반면, 경유 가격은 갤런당 42센트(약 558원) 상승했다.

중질유(비중이 높은 기름) 공급이 갑자기 줄어들어 세계적으로 경유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을 줄인 사우디·러시아산 원유가 고유황 중질유다. 앨런 겔더 우드맥켄지 부사장은 WSJ과의 인터뷰에서 "사우디의 원유는 (브랜트유·WTI와 같은)경질 원유를 정제했을 때 보다 디젤의 생산 수율이 높다"고 설명했다. 반면 미국 텍사스 유전과 셰일가스층, 유럽의 북해 유전 등에서 나오는 원유는 저유황 경질유다. 휘발유와 항공유 등이 더 많이 나오는 반면 경유의 생산량이 중질유에 비해 소폭 떨어진다.

한국도 경유 오름폭이 더 크다. 오피넷에 따르면 5월 첫째 주 보통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661원에서 9월 둘째주에 1759원으로 98원 올랐고, 경유는 같은 기간 리터당 1529원에서 1655원으로 126원 올랐다. 한국은 주로 중동에서 장기계약으로 원유를 수입하고 있고, 정유사들의 설비 역시 중동산 원유에 맞춰져 있어 유럽과 미국에 비해선 오름폭 격차가 적은 편이다. 그러나 경유 국제 거래 시세가 상승하고 있는 탓에 올겨울엔 작년 하반기와 마찬가지로 경유값이 휘발유값을 뛰어넘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경유값 유독 많이 뛴 이유…또 러시아·사우디 때문 [원자재 이슈탐구]

작은 생산 수율 차이로 가격에 엄청난 영향

유럽 각국의 정유사들은 러시아산 원유를 안정적으로 처리하도록 공장 설비를 세팅해놓은 탓에 지난해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 이후 생산 차질이 계속되고 있다. 비슷한 사우디 원유라도 들여와야 하는데 사우디는 올들어 하루 100만 배럴 씩의 원유 생산을 줄였고, 연말까지도 생산을 늘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탓에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유럽 최대 정유 공장을 운영하는 쉘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원유 대신 사우디 원유를 주로 사용했지만, 최근 물량이 부족해지면서 미국산 원유 사용을 점차 늘리고 있다.

정유 공장에서 중질유 대신 경질유를 사용할 경우 배럴당 디젤 생산량이 1.5% 가량 줄어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적은 비율이지만 전 세계의 엄청난 석유 소비량을 감안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유럽 주요 정유공장들이)경질유를 원료로 사용할 경우 중질유를 쓰면 하루 120만 배럴의 경유가 적게 생산되는 셈"이라며 "경유 120만 배럴은 독일과 영국의 생산량을 합친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경유 수급난으로 중동산 원유 가격은 치솟고 있다. 중동 원유의 벤치마크인 두바이 원유 선물은 지난 14일 배럴당 93.45달러에 거래되며 10개월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중이다. 같은 날 WTI 원유는 배럴당 90.16달러로 장을 마감했다. 과거 WTI 원유에 비해 저질 제품으로 취급돼 값이 쌌던 두바이유가 오히려 비싸졌다. 비중이 높고 유황이 많이 포함된 중동산 원유는 정제하는 데는 고도화된 시설이 필요하고 정제 비용도 많이 든다.
사진=로이터
사진=로이터

경유 부족 당분간 지속된다

중국 정부의 여행 제한 완화 이후 항공유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도 경유값 상승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분석된다. 항공유의 경우 5월 이후 50%가량 올라 경유보다 더 가파르게 상승했다. 정유사들이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축소했던 항공유 생산 관련 시설을 재정비해 생산을 늘리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원유에서 항공유를 많이 뽑아낼 경우 경유 생산량은 줄어드는 데, 정유사들은 마진율이 높은 항공유 생산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

올겨울 경유 부족은 더 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정유사들이 다음 분기에 작년 같은 기간보다 일일 240만배럴의 원유를 더 많이 처리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낮은 수율로 인한 경유 생산 감소를 상쇄하기엔 부족하다는 분석이다. 겨울철인 4분기엔 경유 외 다른 난방 연료 생산도 늘려야 한다. 금융사들 역시 일제히 경유값 상승에 베팅하고 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에 따르면 레버리지 펀드 또는 차입금을 활용해 거래하는 투자자들은 최근 경유 파생상품 선물에 대해 22개월 만에 최대 규모의 순매수 포지션을 확보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올해는 OPEC+의 원유 감산과 항공유 생산에 대한 집중으로 인해 경유 생산을 늘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