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정말 특이한 나라예요. 이렇게 열정적이면서 까다로운 예술적 취향을 지닌 2030 컬렉터는 세계 어디에도 없거든요. 이런 ‘영리치(young rich)’들을 팬으로 만들려면 오랫동안 공을 들일 수밖에 없습니다.”8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에서 만난 한 명품업체 관계자는 상품 판매에 별 도움이 안 되는 미술 후원 행사를 마련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와 경매회사의 미술 후원 행사는 올해 KIAF-프리즈의 가장 큰 볼거리이자 이야깃거리다. 한국의 미술 애호가를 대하는 방식이 일회성 팝업 행사 중심이던 과거와 크게 달라져서다.세계 양대 경매회사 크리스티는 지난 5~7일 이태원 현대카드 스토리지에서 ‘헤드업: 앤디 워홀×바스키아’ 전시를 열었다. 장 미셸 바스키아가 그린 472억원짜리 ‘전사’ 등 세계적인 걸작들이 걸렸다는 소식에 1500여 명이 다녀갔다. 크리스티의 세계 10개국 지점 중 경매 프리뷰가 아닌, 순수 전시를 기획한 건 한국이 유일하다. 이학준 크리스티 한국 대표는 “크리스티 본사 차원에서 한국은 장기적으로 성장 가능성이 큰 시장으로 생각해 다른 국가와 차별화된 기획을 한 것”이라고 했다.프라다도 5~6일 서울 인사동 복합문화센터 ‘코트’를 빌려 ‘프라다 모드’ 행사를 열었다. 프라다 모드는 독일 아티스트 카르슈텐 횔러가 2008년 기획한 ‘프라다 더블 클럽’이 기원이다. 마이애미, 홍콩, 런던, 파리 등에서 열린 이 행사가 서울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밖에 에르메스, 루이비통, 디올, 발렌티노, 브레게, 샤넬 등이 자체 전시와 연계한 VIP 행사를 기획했다. 보테가베네타는 리움에서 열리는 강서경 개인전과 개막 기념 파티를 후원했다.김보라/최지희 기자 destinybr@hankyung.com
한옥이 길게 늘어선 북촌 자락, 그 길을 올라가다 보면 4층 규모의 소박한 한옥이 눈에 띈다. 옆으로 난 작은 문을 열자 좁은 1층 공간에 하얀 도자기들이 창밖 햇살을 받으며 반짝반짝 빛났다. 소담하게 놓인 찻잔과 그릇들. 그 위에는 우아한 백자 그릇을 굽기 위해 지나갔던 불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다. 바닥엔 크기가 성인 여성 몸통만 한 달항아리가 줄지어 놓여 있다. 자연광을 받으며 투박한 듯 줄지어 선 달항아리는 한낮에도 달이 뜬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뒤를 돌자 의자와 협탁 그리고 서랍장이 손짓한다. 여느 집에서나 만날 수 있는 작은 인테리어 소품들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 소재와 문양 그리고 빛깔이 특별하다. 바탕은 흰색이지만 마냥 희지 않고, 모든 문양을 하나하나 손으로 파낸 흔적이 눈길을 끈다.‘우보만리: 순백을 향한 오랜 걸음’이라는 주제의 이번 전시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 주간을 맞아 지난달 25일부터 북촌의 한옥에서 열리고 있다. 이걸 기획한 건 프랑스 명품 브랜드 샤넬.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예올공예재단과 손잡았다. 한국 전통공예의 미를 이어온 예올과 장인정신을 중시해온 샤넬이 협업해 ‘한국 전통 장인정신’을 세계에 알리고자 기획한 이 전시는 5년간 지속되고 있다.전시 작가로는 우리나라 화각장인 한기덕과 도예가 김동준이 꼽혔다. 샤넬과 예올은 두 작가를 위해 한옥 4층 전부를 내줬다. 선발 과정은 엄격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예인들을 방방곡곡 찾아다녔다. 선발된 두 작가도 선발이나 심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단지 “공예 전시를 준비하고 있으니 작품 몇 가지를 내줄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만 들었다고.이번 전시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양태오’라는 이름 때문이다. 건축전문지 ‘아키텍처럴 다이제스트’에서 한국인 최초로 세계 100대 디자이너에 선정된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그가 살고 있는 한옥 디자인이 세계에서 주목받으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샤넬과 예올의 전시를 위해 총괄디렉터로 나섰고 작품도 협업했다.전시 개막일에 만난 양 디자이너는 올해 미술주간에 한국 전통공예를 알리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설렘이 가득해 보였다. 그는 “아주 작은 공예품에도 인간과 민족이 살아온 여정이 담겨 있다”며 “이번 전시와 기획을 통해 이런 가치들이 과거에만 머물러 잊히거나 사라지지 않길 바란다”고 거듭 강조했다.한기덕 화각장과의 작품 협업에 팔을 걷어붙인 이유에 대해서도 “장인의 전통 작품에 양태오만이 낼 수 있는 동시대적 미학과 기능을 더한다면 현대인들에게 더욱 긍정적인 의미를 가져다주는 좋은 도구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년 넘게 전시를 기획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 또한 ‘전통성과 동시대성의 조화’였다고 한다. 그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시선으로 전통의 기술과 현대적 미학의 만남이 이뤄지는 것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고 했다.양 디자이너는 샤넬과 예올의 이번 전시, 구찌의 한옥 패션쇼, 보테가 베네타의 한국 작가 지원 등이 최근 줄줄이 이어지면서 글로벌 브랜드의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지금 해외 브랜드들의 한국 로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단순한 유행으로 치부되지 않고 앞으로 계속되길 바란다”고 말했다.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
“그 누구보다도 ‘실용주의 철학’을 견지한 가브리엘 샤넬, 그가 오늘 여기서 이 조선백자와 공예를 봤다면 분명 좋아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지난달 25일부터 서울 삼청동 한옥에서 샤넬과 예올공예재단이 주최하는 특별전시 ‘우보만리: 순백을 향한 오랜 걸음’을 열고 있는 도예가 김동준(43)과 화각장 한기덕(50)의 말이다. 두 작가는 샤넬과 예올공예재단이 선정한 ‘올해의 공예인’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 장인을 위해 샤넬과 예올은 4층 규모 한옥을 전부 털어 전시관을 마련해줬다.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 기간에 두 작가의 작품이 해외 컬렉터와 관람객에게 ‘한국의 진정한 미’를 선보이기에 최적이라는 판단에서다. 한국의 ‘진정한 美’ 선보일 기회김동준은 일본에서 먼저 알아봤다. ‘한국 대표 도자기 작가’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도예가다. 2019년 일본 오사카에서 선보인 백자 차 도구 전시가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전시관을 찾은 일본 관람객들은 그가 만들어 낸 백자 속 장작 가마만이 낼 수 있는 불 자국과 빛깔에 매료됐다. 순식간에 차 도구 주문이 몰려들었다.김 작가는 “평생 넉넉하게 작업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돈을 벌 기회는 처음이었다”며 “그때 들어온 주문이 너무 많아서 3년 동안은 주문 들어온 것만 작업해도 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하지만 그는 그 주문을 단 한 건도 받지 않았다. 달항아리에 몰두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당시 나의 달항아리는 항상 2%가 빠진 느낌이었다”며 “육체가 건강할 때 오로지 크고 무거운 항아리만 묵묵히 만들며 스스로를 의심하고 점검하고 싶었다”고 했다. 김동준은 자신을 오랜 시간 고뇌하게 한 달항아리와 그를 유명하게 만든 차 도구들을 이번 샤넬·예올 전시에서 모두 선보인다.한기덕은 대중에게 생소한 화각이라는 작업을 20년 넘게 한 장인이다. 화각공예는 쇠뿔을 얇게 갈아 뒷면에 무늬를 그려 장식하는 공예품이나 그 기술이다.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이 예술가를 화각장이라고 부른다.한기덕은 화각장이던 아버지의 길을 물려받아 이제 세계에 두 곳만 남은 화각공예 전문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이른바 ‘공돌이’이던 한 작가는 아버지의 길을 따르고 싶어 2년간 일한 로봇설계회사를 그만두고 늦은 나이에 화각에 뛰어들었다.“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이제 이 세계에서 화각은 사라지겠구나 생각하니 아득했다”는 그는 “그날로 일을 때려치우고 직접 사업계획서까지 작성해가며 아버지를 6개월간 설득해 공방에 제자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1=2’라는 답이 정해진 공식만 알던 공대생이 정답이란 없는 공예를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그는 화각이 세상에 둘도 없는 블루오션이라고 느꼈다. 샤넬의 눈을 사로잡은 것도 이 점 때문이다. 세계 유일한 화각 샤넬 사로잡아“화각이라는 건 국내에도, 심지어 세계에도 하는 사람이 없다”며 “세계에 오로지 한국밖에 없다는 그 희소성이야말로 화각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29호로 지정됐다.두 작가에게 KIAF-프리즈 기간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전시가 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특별하다. 한국에 몰리는 세계 예술 애호가들에게 스스로 지켜 온 한국의 공예를 보여줄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김동준은 “시절인연이라는 이야기가 있듯, 리움미술관 전시와 대통령 해외 방문 선물 등으로 달항아리가 세계적인 관심을 받을 때 도예가로서 달항아리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며 “아무리 노력해도 시대가 안 알아주는 작가도 있는데, 나는 시대를 잘 타고났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그는 이번에 ‘백지상태’에 가까운 백자를 관객에게 선보인다.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그날부터 그는 가마에서 나온 직후 깨 버린 도자기가 셀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수행하는 과정을 거쳤다.“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는 초심으로 돌아가 장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기본에 충실한 그릇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단순하면서도 한국인으로서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특징을 고민하기 위해 조선시대 도자기의 시기와 지역별 디자인의 특징 및 차이를 관찰하고 오랜 기간 연습했습니다.” 수백 수천번 빚은 조선백자한기덕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전시 총괄을 맡은 양태오 디자이너와 ‘특별한 컬래버’로 탄생한 작품 세 가지를 내놨다. 전시관 1층에 전시된 협탁, 서랍장과 의자다. 인테리어디자이너인 양태오의 아이디어와 한기덕 장인의 화각이 더해져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화각 가구’가 탄생했다. 이번 공동 작업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20년간 고집해오던 작업 방식을 완전히 깼다는 데 있다. 한 작가는 “화각 특유의 문양과 색감을 최대한 뺀 것은 인생 처음”이라며 “양 디자이너의 ‘화각공예 전형을 탈피해보자’는 제안에 끌려 진행했는데,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는 국내 관람객에게조차 생소한 황소뿔 공예인 화각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이번 기회가 즐겁다고 했다.“유일하게 단 한 국가, 한국에서만 제작되는 화각공예의 멋을 샤넬이라는 브랜드와 선보인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며 “현대적으로 화각을 새롭게 해석한 양 디자이너와의 작업은 전통적인 공예품도 시대에 맞춰 바뀔 수 있다는 진일보한 새로운 가능성과 대안을 제시한 전시라고 생각한다”고 했다.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