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 스틸컷. /사진제공=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컷. /사진제공=유니버설 픽쳐스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꼬여있는 시간 구조와 CG를 사용하지 않고 현실감 넘치는 아날로그 방식을 구현하는 영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이자 각본가, 제작자로서 대규모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만의 세계관을 확장하고 있다. 그의 영화를 보면, 실로 경이로워서 스크린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만큼 관객들이 느끼는 감각을 중요시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은 체험할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하고자 노력한다. 한국 관객들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이름을 가지고 언어유희를 하며 그의 영화를 평하기도 한다. '놀란'(Surprised) 감정을 주는 감독임과 동시에 '논란'(Cotroversy)으로 의견을 논할 수 있는 이름이라는 것. 놀란의 작품들은 개봉할 때마다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고는 한다.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사진제공=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사진제공=유니버설 픽쳐스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는 미국에서 지난 7월 20일(현지 시간) 개봉해 많은 호평을 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광복절에 개봉했다.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킨 원자폭탄의 아버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전기 영화다. 세상을 구하기 위한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핵 개발을 하게 된 천재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담고 있다.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하며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라는 말을 한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전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 맨해튼 프로젝트의 수장으로 미국이 초강대국이 되는데 큰 도움 줬지만,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떨어진 원폭으로 수십만명의 사람이 사망하자 죄책감에 시달렸다.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사진제공=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사진제공=유니버설 픽쳐스
이후 매카시즘 광풍에 소련 스파이로 몰려 얼룩진 말년을 보내기도 한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러한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토대로 두 가지 핵심축을 두고 재현한다. 극 중에서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1959년 상무장관 지명이 걸린 상원 청문회와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1954년 비공식 청문회가 교차로 오가며, 과거와 현재의 시간 축이 무너지는 것.

평소에도 복잡한 내러티브로 명성을 떨친 놀란이지만, '오펜하이머'는 전기영화인만큼 비교적 어렵지 않은 구성을 취하고 있다. CG 없이 아날로그로 트리니티 실험 재현에 성공하고, IMAX 흑백 아날로그로 찍은 최초의 영화이기도 하다. '오펜하이머'에 담긴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념만큼이나 놀라운 그의 전작들은 뭐가 있을까.

◆ 영화 '메멘토'(2001)

영화 '메멘토' 포스터. /사진제공=(주)디스테이션
영화 '메멘토' 포스터. /사진제공=(주)디스테이션
1998년 영화 '미행' 연출로 데뷔한 놀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것은 영화 '메멘토'(2001)였다. '메멘토'(Memento)는 끊임없이 기억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영화는 아내가 살해당한 후 10분밖에 기억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사진, 메모, 문신 등 눈에 보이는 기록으로 유지되는 기억은 남자에게도 심지어 관객들에게도 혼란스럽다.

영화의 구조는 시간순이 아닌 역순으로 진행되며, 과거의 이야기는 흑백으로 시간순으로 구성돼 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층층이 쌓이는 형태로 주인공과 함께 동화되어 범인을 쫓는 스릴감을 느낄 수 있다. 주인공 레나드 쉘비 역의 배우 가이 피어스는 무엇이 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 몸에 새기는 문신만큼이나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준다. 놀란의 진가를 볼 수 있는 작품으로 복잡한 시간 구조에 다소 머리가 아프지만, 보고 나면 '아!'하고 탄성이 나오게 될 만한 작품이다.

◆ 영화 '배트맨 비긴즈'(2005), '다크 나이트'(2008),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

영화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라이즈'. /사진제공=워너브라더스 코리아(주)
영화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라이즈'. /사진제공=워너브라더스 코리아(주)
놀란이 물리학이나 과학 영화만 만드는 감독으로 기억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배트맨' 시리즈를 통해 DC 세계관을 확장한 크리스토퍼 놀란은 화려하고 스펙타클한 블록버스터 영화의 장인이기 때문이다.

특히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라이즈' 3부작은 놀란의 필모그래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그동안 DC에서 여러 차례 변주해온 '배트맨'은 마이클 키튼, 조지 클루니, 벤 애플렉, 로버트 패틴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천사를 보여줬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에서 배트맨 브루스 웨인을 맡은 배우 크리스찬 베일은 고고하고 날카로운 이미지로 고담시의 묵직한 분위기에 힘을 더했다. 극 중에서 브루스 웨인은 부모님이 길거리에서 피살되는 것을 목격하고 죄의식과 분노로 늘 고통받는 캐릭터다. 그림자처럼 드리워져있는 죄책감 탓에 겉으로 나서기보다는 내면의 고통에 잠식되는 모습을 보인다.

배우 히스 레저를 조커 역으로 기용한 놀란은 '다크 나이트'에서 흡입력을 폭발시켰다. 도로 위의 무법자가 되어 질주하는 카 체이싱 액션과 병원을 폭발하는 장면은 사실감을 증폭시킨다. 히스 레저의 선한 얼굴 위에 덮은 얼룩덜룩한 분장은 섬뜩한 미소로 '배트맨' 시리즈의 완벽한 빌런이 된다. 배트맨의 정체는 모르지만,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는 짐 고든(게리 올드만)과 집사 알프레드(마이클 케인)의 탄탄한 연기력으로 영화는 빛을 발한다.

'배트맨'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어두컴컴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고담시를 구현해내는 방식이다. 그동안 DC를 통해 스크린에 구현해온 고담시를 광기가 서린 도시로 표현한 놀란. 미국 뉴욕시를 연상시키는 높은 건물들과 다리, 게다가 어둠으로 인해 불안함이 감도는 길거리까지. 빛과 어둠의 조화로 인해 놀란이 그려낸 '배트맨' 시리즈는 입체적으로 표현됐다. 단순히 '배트맨'이 영웅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닌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양면적인 특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지면서 놀란의 '배트맨'은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 영화 '인셉션'(2010)

영화 '인셉션' 포스터. /사진제공=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영화 '인셉션' 포스터. /사진제공=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우리의 무의식은 얼마나 깊고 광활할까?' 영화 '인셉션'은 타인의 꿈에 침투해 생각의 불씨를 심는 작전을 실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타인의 꿈 안에 침투해 생각을 훔치는 특수 보안요원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통해 라이벌 기업의 정보를 빼내고자 하는 사이토(와타나베 켄).

그의 지시에 따라 요원들을 생각을 심는 '인셉션' 작전을 실행하게 된다. '인셉션'의 시간 레이어는 겹겹이 쌓여있다. 꿈속의 꿈이라는 구조 안에서 로버트 피셔(킬리언 머피)를 속여서 금고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을 없애는 것. 이들의 임무는 간단한 듯 여겨지지만,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서도 안 되며 시간 내에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10시간을 이동하는 비행기 안에서 꿈을 꾸면 1주일가량의 시간을 벌고, 다시 꿈 속으로 들어가면 시간의 폭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셉션' 작전에는 한 가지 변수가 등장한다. 피셔 모로우 기업의 후계자인 로버트 피셔의 무의식에 자리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욕구 탓에 납치한 피셔를 구출하려는 요원들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와중에 코브는 아내 맬(마리옹 꼬띠아르)에 대한 죄책감으로 설계해둔 꿈 안에는 균열이 생겨난다. "생각은 바이러스와 같아. 끈질기고, 전염성이 강해. 좁쌀만한 생각이라도 자랄 수 있어. 한 사람을 가두거나 망가뜨릴 정도로"라는 대사처럼 '인셉션'은 무의식 깊은 곳에 숨은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나간다.

◆ 영화 '인터스텔라'(2014)

영화 '인터스텔라' 포스터. /사진제공=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영화 '인터스텔라' 포스터. /사진제공=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놀란의 저력이 드러난 영화 '인터스텔라'는 영화적 체험을 제공하며 극장에서 관람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작품이다. '인터스텔라'(Interstellar)는 '~의 중간의, 사이의'를 뜻하는 접두사 inter와 '별의'를 뜻하는 stellar의 합성어로 '항성 간의, 성간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화는 지구와 행성 사이의 거리를 부각하며 닿을 수 없는 물리적 격차를 강조한다. 주인공 쿠퍼(매튜 매커너히)는 전 세계적인 식량 부족으로 인해 우주를 탐험해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상황은 '인터스텔라'의 중심축이 된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의 딸 머피의 방 안에 있던 책방 건너편에서 차원을 초월하며 메시지를 남기는 것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극 중에서 머피는 과학적 용어인 '머피의 법칙'을 토대로 정해진 이름. 쿠퍼는 "머피의 법칙이란 나쁜 일이 생긴다는 뜻이 아냐.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난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놀란의 영화를 보면,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는 '일어날 일'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언젠가라는 장담할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지만, 무언가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전하는 놀란 감독의 마음이 느껴진다. 시공간은 다르지만, 가족에게 전하고자 하는 변하지 않는 마음이 닿기를 바라는 것처럼 '인터스텔라'는 중간의 틈을 이용해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 영화 '덩케르크'(2017)

영화 '덩케르크' 포스터. /사진제공=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영화 '덩케르크' 포스터. /사진제공=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서의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진 영화 '덩케르크'는 영화가 지닌 매체적 특성을 가장 잘 활용한 영화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40만여 명의 영국,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네덜란드의 병력을 영국 본토로 탈출시키는 작업을 담고 있는 영화 '덩케르크'.

9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편집상, 음향편집상, 음향믹싱상)을 수상한 '덩케르크'는 전쟁 상황에 대한 고증과 전투함, 전투기 등에 대한 디테일한 표현으로 호평받았다. 당시 실제 작전에 참여했었던 참전용사 켄 스터디는 영화를 본후 피플지(紙)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로 돌아간 기분"이라는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플롯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놀란답게 '덩케르크' 역시 세 개의 시점을 교차편집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덩케르크에서 1주일, 바다에서 1주일, 상공에서 1시간이라는 각기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마지막에 세 시점에 합쳐지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 정교하고 치밀한 내러티브 구성안에는 전쟁이라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중심을 잃고 상황을 헤쳐가는 군인들의 감정이 내포된 것이다. 신인 배우 핀 화이트 헤드는 토미 역을 맡아 카오스가 된 전쟁통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면서도 금세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모습으로 열연을 펼쳤다.

◆ 영화 '테넷'(2020)

영화 '테넷' 포스터. /사진제공=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영화 '테넷' 포스터. /사진제공=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영화 '테넷'을 보고 극장을 빠져나온 사람들이라면, 드는 하나의 생각. '내가 지금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나?' 물리학과 양자역학을 기반으로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은 그만큼 복잡하다. 숨 가쁘게 영화의 내용을 쫓아 '테넷'의 세계관을 이해한다고 해도 따라가기는 다소 버겁다.

개봉했을 당시, N차 관람을 하며 시간 구조를 분석한 관객들이 있을 정도라고. 영화는 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인버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세상을 파괴하려는 사토르(케네스 브래너)를 막기 위해 투입된 작전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닐(로버트 패틴슨)과 협력해 미래의 공격에 맞서 제3차 세계대전을 막는다는 구조다. 기본적으로 열역학 법칙, 할아버지 역설, 자유의지, 결정론을 알고 있다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놀란은 '테넷'을 통해 시간의 방향을 바꾸고 일종의 역설을 보여준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다"와 같은 대사처럼 '테넷'은 인간의 결정과 운명, 삶을 관통하는 시간에 대해 다루고 있다. '테넷'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N차 관람은 필수인 듯하다.

놀란은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옮겨 다니는 '플롯의 마술사'다. 겹겹이 레이어를 쌓는 이야기와 스펙터클하고 사실감 넘치는 액션까지. 영화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놀란의 영화는 그렇기에 기다려지고 설렘이 느껴진다. "늘 복잡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에 끌렸다"는 놀란의 말처럼 그의 영화는 복잡하고 어렵지만 그렇기에 더 마음을 사로잡는다. 영화 '오펜하이머' 역시 복잡한 상황에 부딪힌 결함 있는 한 인간을 조명한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