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예술이 된 것처럼 디자인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예술의 전당 한가람 디자인 미술관

디자인은 예술일 수 있을까? 전시집단 실무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보수적인 예술계에서 디자인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았다.

“디자인은 예술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단지 전시 주제의 다양화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디자인이 전시 영역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여겨진다.”(서울시 혜화동 소재 아트페어 주최 상업 갤러리 큐레이터 K )

“디자인은 태생적으로 예술과는 다르고, 또 디자인이 예술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현재 디자인 전시가 늘어나는 이유에는 현대미술이 가진 대중과의 괴리에 기인한다. 현대미술의 개념적 난해함과 모호성은 대중과의 소통의 문제로 이어졌다. 하지만 디자인이 가진 미적 감각은 대중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전시의 시각적 만족과 관람객과의 소통을 쉽게 끌어낸다. 하지만 디자인 고유의 가치와 예술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서울시 반포동 소재 대기업 소속 상업 갤러리 큐레이터 L )

“이제 디자인은 예술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현대미술에서는 안상수 교수를 시작으로 이미 많은 디자이너들이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고, 작업도 매우 훌륭하다. 일본이나 유럽의 현대미술 전시를 살펴보면 점차 장르의 구분도 모호해지고 있다. 디자인이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 소재 중형 사립미술관 학예사 L)

큐레이터들은 모두 예술 제도 내에서 디자인이 관찰되고 있는 현상에 동의하고 있다. 각각의 큐레이터들은 ‘예술’에 관한 개인의 철학에 따라 예술에 대해 정의하고 디자인 전시의 현상에 관해 평가하였다. 이들의 상이한 입장은 새로운 지점에서 태동한 디자인의 불분명한 형태를 해석하기 위한 논쟁으로는 좁혀가기 어려울 것이다. 왜 이러한 논쟁이 발생하기 시작했는지 살펴보자.

디자인이 지닌 본질적 미덕으로서의 기능성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산업혁명 이후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새로운 사물들을 계획하는 과정을 뜻한다. 이는 과거의 공예적 생산과 차별화되는 개념으로 명명된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산업화를 기점으로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개념 역시 여러 나라에서 비슷한 고민을 통해 발전해 왔다. 초기 디자인 이론의 사상가들은 기능성과 효율성을 갖춘 상품을 보급함으로서 다수에게 양질의 평등한 삶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러시아 구성주의, 데스틸, 공일공작연맹, 바우하우스, 국제주의 양식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다.

디자인이 지닌 심미성의 부각


하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평등의 가치가 자유의 가치로 변증되는 과정에서 디자인 철학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유기적인 형태를 비롯한 새로운 스타일이 대량 생산에 반영될 수 있을 만큼 기술이 뒷받침되면서 표현을 존중하는 태도는 더 확고해졌고, 이는 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졌다. 특히 포스트모던 시기에 들어서면서 디자인의 이러한 경향은 짙어졌다. 디자이너의 작품들이 미술관에 전시되며 대중이 감상하는 예술의 형태로 선보여졌다. 이 흐름은 이론가와 평론가 집단을 통해 조명되기 시작했다. 미술관 애호가들 사이에서 한정판 디자인의 수집이 인기를 끌었고 디자인 전시는 늘어갔다.
영화가 예술이 된 것처럼 디자인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아트 퍼니쳐

예술의 신축성


‘예술 영화’의 시작을 이야기하면 흔히 까뉴도(Ricciotto. C, 1911)의 ‘제7 예술선언 (Reflections on the Seventh Art,1923)’을 언급한다. 그는 기존 예술을 6개 장르로 구분하고, 영화를 7번째의 종합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최초의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 (Lumiere, 1895)가 시네마토그래프를 선보이며 시작되었으나, 정작 그들은 이 기계를 ‘미래가 없는 발명품’이라며 팔아버렸다. 하지만 발전을 통해 영화가 의도를 표현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자 감독의 ‘인공성’을 영화제와 협회, 평론가, 영화제, 관객등의 집단이 뒷받침하게 되었고, ‘예술 영화’의 개념이 구축되었다.

조지 딕키는 예술의 구별은 ‘미적 본질’이 아닌 ‘예술 제도의 권위 수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예술 제도론’을 제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제도’라는 개념은 아주 공고하게 체계화된 것이라기보다 자연스럽게 ‘수립된 관습’이며, 예술계는 신축성을 지녀서 포섭될 수 있는 체계의 수에 제한이 없다”라고 부연했다.

영화계의 사례처럼 디자인계에도 예술로서의 제도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디자인이 기술적 적응을 위한 실용적 계획에서 변이하여 표현과 감상의 대상이 되는 흐름을 따로 떼어 ‘예술 디자인’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예술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이며, 2000년을 즈음하여 한국에서는 그 실제적 양상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국의 디자인 예술


한국 디자인 예술의 경우 ‘압축적 경제 성장’이라는 사회적 특성과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광복 이후 1980년대까지 국가적 목표를 빠른 산업 성장에 두고 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디자인 역시 산업적 가치에 특별한 방점을 두고 성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디자인은 주로 전자제품, 자동차, CI 등의 산업디자인을 의미했다.

특히 한국에서 예술 디자인이 뜨거운 감자였던 것은 한국적 토양에 있어서 이 ‘산업성’이 디자인의 중요한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자인 예술’의 개념이 성립이 가능한 가에 대해서, 디자인은 목적이 있기 때문에 순수 예술이 될 수 없다는 보수적인 의견, 예술과 디자인은 다르지만 현대미술의 전략으로 디자인을 수용하고 있다는 냉소적 의견, 예술과 디자인의 차이는 소통되는 맥락 밖에 없다는 진보적 의견이 나뉘어 나타났다. 하지만 ‘디자인 예술’ 현상이 점차 확대되는 현 시점에서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다층적인 고찰과 발전적 논의가 필요하다.

미술관의 디자인 전시 동향


디자인 전시 동향을 살펴보기 위해 2021년 1월 기준으로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된 국공립·사립·대학을 포함한 국내 전체 미술관 271개관과 2022년 2월 기준으로 한국박물관협회에 등록된 국공립·사립·대학을 포함한 전체 박물관 665개관을 더해 목록화했다. 이 중 중복된 기관을 제외한 총 963개 기관을 전수 조사하여 디자인 전시를 분석했다. 디자인 분야를 선별할 때에는 인접 분야인 미술, 건축, 공예, 사진, 미디어와 관련된 전시는 제외하고 순수한 디자인 관련 전시만을 택하였다. 그 결과 1987년 이후 2021년까지 총 817회의 전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디자인 전시의 연도별 추이를 보면 19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전시가 늘어나 2010년부터는 큰 폭으로 증가함을 알 수 있다. 2019년 최다 전시 수를 기록한 이후에도 많은 전시가 이어졌으나 2020년과 2021년에는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전시가 감소했다.


영화가 예술이 된 것처럼 디자인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한국 미술관의 디자인 전시 동향

디자인 전시가 대중적 관심을 받기 시작하자, 디자인 전문 미술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의 디자인 미술관은 1999년 개관한 사립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이다. 한가람디자인미술관은 1999년 ‘디자인의 발견-일상 속의 디자인 문화’를 시작으로, 2000년 ‘디자인 혹은 미술’, 2002년 ‘브루노 무나리’, 2005년 ‘갖고 싶은 의자’, ‘덴마크의 공공디자인-콘트라푼크트’, 2007년 ‘베르너팬톤’, 2012년 ‘핀란드 디자인전’ 등을 통해 다양한 디자인 영역을 다루는 기획을 시도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87년 현대의상전, 1989년 독일 바우하우스전을 통해 디자인 전시의 문을 열었고, 2013년 7월 과천관 제3전시실을 디자인 상설 전시관으로 지정하여 디자인 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끌어올렸다. 2002년 ‘Less and More’, ‘디자인, 또 다른 언어’, 2014년에는 ‘사물학, 디자인과 예술’, ‘바우하우스의 무대실험, 인간, 공간, 기계’ 등의 전시를 통해 근대 디자인 정신을 대중에게 소개했다.

2014년엔 DDP 디자인 뮤지엄이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 개관했다. DDP는 대중적으로 반향이 큰 전시들을 다수 개최했다. 2014년 ‘스포츠디자인’, ‘엔조마리 디자인’, ‘울름 디자인과 그 후’, 2017년 ‘픽사 30주년전’, 2018년 ‘스위스디자인전’ 2019년 ‘행복의 기호들, 디자인과 일상의 탄생’, ‘바우하우스 미러’, 2021년 DDP ‘생각을 만드는 디자인’ 등 전시가 그 예이다. 2002년 개관한 대림미술관은 2008년 ‘에어 월드: 하늘 위 디자인의 모든 것’, ‘비트라 순회전’을 시작으로 디자인 분야에 집중하는 큐레이션을 선보였다. 이후 대림미술관은 디자인 중점 미술관으로 자리하며 디자인의 예술성을 대중적으로 조명했다. 2012년 ‘핀율 가구 100주년 기념전’은 그 해 사립미술관 최다 관객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영화가 예술이 된 것처럼 디자인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한국의 디자인 전문 미술관'

미술관별 전시 수를 살폈을 때 조사 기간 중 10회 이상 디자인 전시를 한 곳은 18개관에 이른다. 이들 중 예술의 전당이 244회로 디자인 전시를 가장 많이 했고, 이는 전체 디자인전의 29.6%에 해당한다. 뒤를 이어 DDP 디자인 뮤지엄과 세종문화회관이 가장 많은 디자인 전시를 했다. 이 상위 3개 기관이 전체 전시의 46.7%의 전시를 관장하며 디자인 전시를 이끌어 왔다. 또 서울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등의 시립미술관과 경북대학교 미술관, 서울대 미술관 등의 대학부설 미술관, 금호미술관 성곡미술관 환기미술관 등의 유명 사립미술관들도 다수의 디자인 전시를 개최했다.

디자인 갤러리와 대안공간의 디자인 전시


통계에는 포함할 수 없었지만, 다양한 갤러리와 대안공간도 의미 있는 전시를 선보였다. 2004년 개관한 국민대 제로원센터 디자인 갤러리는 해외 디자인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전시로 주목받았다. 제지사에서 만든 갤러리들도 디자인 전시에 관심을 보였다. 2004년 개관한 삼원페이퍼갤러리는 2021년 삼원갤러리로 재개관했는데, 2015년 개관한 두성페이퍼 인더페이퍼갤러리와 함께 여러 그래픽디자인 작품을 전시해오고 외부 디자인 전시를 후원하기도 했다. 또 2002년 갤러리팩토리, 2006년 테이크아웃드로잉 등의 대안공간이 개관하여 전시를 통해 여러 디자인 담론을 제시해 왔다.

디자인 아트페어 및 비엔날레


페어와 비엔날레도 디자인 예술의 주요한 장으로 자리했다. 1994년 시작된 ‘서울 리빙 디자인 페어’는 상업 행사임에도, 다양한 특별전과 기획전을 열어 디자인 작품을 대중에게 알려 왔다. 2001년에는 안상수가 기획한 비엔날레인 ‘타이포 잔치’가 시작되었다. 2002년 시작된 ‘서울 디자인 페스티발’은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을 알리고, 다양한 디자인 작품을 소개해 왔다. 2005년 시작된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는 탄탄한 기획과 시의성 있는 작품들을 통해 매번 최다 관객 수를 갱신하며 한국의 대표적 행사로 자리잡았다. 2007년에는 서울시에 디자인 총괄본부가 건립되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2008년 ‘서울 디자인 올림픽’이 개최되어 다음해까지 이어졌다. 2009년에는 ‘예술의 전당 디자인 아트페어’와 ‘서울 디자인 위크’가 시작되었다. 2010년에는 서울시가 ‘세계 디자인 수도’로 선포되며 서울 디자인 올림픽을 계승한 ‘서울 디자인 한마당’을 개최하였다. 이외에도 여러 행사들이 디자인 예술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디자인 옥션


국내 디자인 예술 경매는 2010년 서울옥션을 통해 시작되었다. 서울옥션은 1998년 국내에 예술품 경매 시스템을 도입해, 2007년 디자인 크로프트를 설립하여 디자인 예술 옥션을 시도했다. 2010년 4월 17일 열린 첫 디자인 경매에서는 출품작 73점 가운데 66점이 팔려 낙찰총액 21억9000만원, 낙찰률 90.04%를 기록했다. 2018년부터 서울옥션 블루에서는 디자인의 온라인 경매와 판매도 진행하였다. 그 결과 디자인 예술 옥션이 활성화되었고, 디자인 작품의 소장에 대한 인식이 늘어났다.
영화가 예술이 된 것처럼 디자인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한국 디자인 예술의 특징


예술제도 안에서 디자인이 예술로서 제시되고 감상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디자인 예술은 한국의 예술계의 주요한 주제로 부상했고, 이제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국의 디자인 예술은 두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세계적 추세에 비해 빠른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 둘째, 디자인을 산업적 도구로 여기는 편견과 맞서야 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1937년 포스터전(Spanish and U.S. Government Posters)과 1938년 제품전(Useful Household Objects under $5.00을) 시작으로 디자인 전시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미국보다 정확히 50년 늦은 1987년과 1988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처음 디자인 전시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디자인 예술 담론이 형성된 것은 미국과 비슷한 1990년대이다. ‘디자인예술’이라는 용어는 1999년 예술옥션 필립스(Phillips de Pury)의 디자인 책임자 알렉산더(Alexander, P.)에 의해 공식적으로 언급되었는데, 같은 해 한국에서는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을 개관을 통해 이 개념이 담론화되었다. 한국의 여느 분야들처럼 디자인 예술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는 집단과 그 제도 역시 압축적 성장을 이룬 셈이다.

하지만 그 성장 이면에는 큰 진통이 있었다. 그 시기 한국 사회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산업 영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창작적 가치는 경시하는 풍토가 은연중에 자리해 있었다. 한가람 디자인 미술관도 문화체육관광부가 1999년 2월 ‘7대 문화산업 육성 계획안’을 발표하고 기존 문예 진흥원을 ‘디자인 미술관’으로 운영하고자 하였으나 미술계의 반발에 부딪혀 10월에 이르러서야 현재 자리에 예술의전당을 설립할 수 있었다. 2000년 디자인 미술관의 두 번째 기획전 ‘디자인 혹은 예술’ 도록에는 “갑갑한 산업사회의 요구에 순응된 디자인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넓은 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상과 좀 더 넓은 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색, 그리고 산업사회의 요구를 뛰어넘는 모색”이 필요하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간 디자인 예술은 여러 가지 모색을 통해 디자인의 제도적 구축을 이루었고, 디자인의 창작적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를 확장해 왔다. 이제 그 성숙을 기반으로 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디자인의 길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