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음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밀레니얼입니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김동휘의 탐나는 책
『밀레니얼의 마음』
강덕구 지음, 민음사
2022년 11월 30일
『밀레니얼의 마음』
강덕구 지음, 민음사
2022년 11월 30일

그런데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딴지를 걸고 싶은 점이 있는데, 진짜 ‘뉴 밀레니엄’은 2001년 1월 1일이 아닌가 하는 거다. 21세기는 2000년이 아니라 2001년부터 2100년까지이건만, 왜 밀레니엄은 2000년에 시작해버렸는가. 실제로 ‘세 번째 밀레니엄(the third millenium)’이라고 하면 확실히 2001년부터 3000년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올해 23세의 ‘바위’(가 태명이었던 모) 선생님께 어떤 자격 시비를 걸고 싶은 것은 물론 아니고, 실은 나의 아주 사적인 기준 문제와 관련이 있어서다. 필자인 나는 1990년에 태어났는데, 그렇다면 나는 90년대생이 맞는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 말이다. 요컨대 1990년생이란 80년대의 문을 닫고 나온 것인가, 아니면 90년대의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인가.

영미권 인구통계학을 참고하면 Z세대는 1990년대 ‘후반’ 출생부터다. 그 주요 근거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삼는다고 하니까, 스무 살에야 처음 스마트폰을 접한 입장에서 내가 Z세대가 될 수 없음은 수긍할 만하다. 그럼에도 나 또한 같은 90년대생이긴 함에 생각이 미칠 때면 왜인지 좀 억울한 기분이 든다. 이것은 일종의 소외감일까? 혹 너무 일찍 ‘뉴 제너레이션’에서 쫓겨난 삼십대의 섭섭함일까? 어쩌면 그저 Z세대에 끼고 싶어하는 밀레니얼의 아등바등인가? 무엇인가 나도 몰라, 알 수 없는 이 마음…….
글을 장황하게 전개하고 보니, 그러니까 내가 1990년생이라는 사실을 이렇게나 거듭 늘어놓고 나니, 이쯤에서 아무래도 ‘사설이 길었다’라고 써야 할 것 같다. 아주 관성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만큼은 ‘모든 공적인 담론은 사적 고백, 혹은 회고에서 출발하는 법’이라고 변명 겸 선언을 해두련다. 나는 지금 『밀레니얼의 마음』을 읽은 직후니까.

대개 세대론은 세대 밖에서 쓰이는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그 시기를 벗어난 이후, 요컨대 ‘지나고 봐야’ 규정할 수 있다. 주체로서는 당사자가 아닌 외부의 시선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타자화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밀레니얼인 저자는, 그러므로 밀레니얼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밀레니얼이 겪는 불행이란, 망망대해 같은 우주에서 길을 잃고 미아가 된 우주 탐사선” 같은 것, 즉 “밀레니얼은 밀레니얼이 사는 세계의 ‘이방인’이”므로.(15쪽)
자칫 ‘밀레니얼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사회(혹은 시대) 비평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굳이 분류한다면 이것은 회고록이다. 살아 있는, 심지어 ‘젊은’ 사람의 회고록. 자신이 겪은 일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글. ‘소리바다’나 ‘벅스뮤직’이 스트리밍 서비스로 개편되고, 트위터에선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나고, 아트선재 시네마테크에선 고다르 특별전에다 와인 시음회를 이어 붙인다.
그 시절, 그러니까 “상실된 미래와 잊힌 과거가 현재로 유령처럼 투사되는 엉망진창의 난장판”(122쪽)을 지나는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구체적이고 사적인 기록이 아니라면, 누가 만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밀레니얼’이라는 가상의 이미지, 임의의 정의에 어떻게 맞서며 무엇으로 검증할 텐가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