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아내와 함께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 있는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 다녀왔다. 그곳은 만추의 절정이 온산을 휘감고 있는 풍경 한 자락을 뒤집어쓴 채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양지바른 곳에 나란히 누워 있는 황순원 선생 내외분의 유택(幽宅)에 들러 참배하고, 유품이 보관되어 있는 전시실도 둘러보았다. 실로 40년 만에 느껴본 선생님의 흔적이었다.

40년 전, 그러니까 1982년부터 1983년에 이르는 시기에 나와 아내는 황순원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였다. 선생께서 1980년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로서 마지막 가르침을 베풀고 있을 때였다. 2000년에 이승을 벗어나신 후 2009년 지금의 소나기마을에서 영면에 드셨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으나, 찾아뵙기는 처음이었다.

작가 황순원(黃順元, 1915~2000) 선생은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교사였던 황찬영 선생의 맏아들로 태어나 1929년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정주 오산중학교를 거쳐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했다. 이 해에 일본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 제2고등학원을 거쳐 1936년 와세다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대동군 향리(鄕里)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했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수록된 단편집은 김환기 그림으로 싸여 있다
황순원 선생은 1930년부터 동요와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물로 첫 시집 『방가(放歌)』(1934), 제2시집 『골동품(骨董品)』을 발간했으며, 와세다 제2고등학원에 다닐 무렵에는 이해랑·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단체인 학생예술좌(學生藝術座)를 만들기도 했으나 희곡작품을 남기지는 않았다.

1935년 《삼사문학(三四文學)》의 동인으로, 이듬해에는 일본에서 발행된 《창작(創作)》의 동인으로, 1937년에는 《단층(斷層)》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동인지 활동을 하던 이 무렵부터 소설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단편 「거리의 부사」를 《창작》 제3집에 싣는 등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40년 첫 단편집 『늪』을 내면서부터 소설에 전념하게 되는데, 주로 단편을 창작하다가 『움직이는 성』(1972) 이후에는 장편 창작에 주력했다. 이처럼 시인으로 출발한 황순원 선생의 문학 인생은 말년에 장편소설 「신들의 주사위」로 대미를 장식하게 되는데, 이 같은 황순원의 문학 여정은 “시에서 출발하여 단편소설의 세계를 거쳐 온 확대 변화의 과정”(김종회)으로 요약된다.

소설가로서의 ‘황순원’이라는 이름이 처음 지면을 장식한 것은 1937년 7월 《창작》 제3집에 「거리의 부사」를 발표했을 때였다. 원고지 30매 정도로 비교적 짧았던 이 작품은 동경에서 이 집 저 집 떠돌아다니며 사는 조선인 유학생의 궁핍한 일상을 극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듬해 10월에 「돼지계」를 발표하고, 이 두 작품을 비롯해서 창작 연대가 확실치 않은 다른 11편의 단편을 함께 묶어 1940년에 단편집 『늪』을 발행했다. 일제의 간섭을 피해 1943년부터 고향에 머물러 있던 황순원은 광복 후 9월에 평양으로 돌아가지만, 곧 공산 치하에서 지주 계급으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이듬해 가족들과 월남한다.

1948년에는 7편의 단편을 수록한 『목넘이마을의 개』를, 1951년에는 「별」‧「그늘」 등이 수록된 소설집 『기러기』를, 1952년에는 11편의 단편을 담은 단편집 『곡예사』를 출간했으며, 이듬해인 1953년에는 그의 대표작인 「학」과 「소나기」가 발표되었다. 이후 1956년 12월에 「학」을 표제작으로 모두 14편의 단편소설을 수록한 소설집 『학』이 출간되었다. 이는 전쟁을 겪으면서 되새겨야 했던 생명의 의미를 담은 역작들이 고스란히 수록된 작품집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무엇보다도 「소나기」로 대표되는 황순원 단편문학의 미학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름다운 장정(裝幀)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책이다.
학_ 앞표지와 뒤표지
학_ 앞표지와 뒤표지
일반적인 4✕6판 크기(128mm✕186mm)에 모두 256쪽 분량의 본문으로 구성된 『학』 초판본은 우선 표지부터 심상치 않다. 앞표지로부터 뒤표지까지 이어진, 현란한 듯 단아한 일곱 마리 학이 노니는 그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녹색과 빨강 그리고 검정으로만 그려진 그림임에도 강렬한 세련미를 풍기며 시선을 빨아들인다. 세로쓰기 편집에 따라 오른쪽을 맨 제본 방식의 앞표지에는 다섯 마리 학 그림과 함께 빨강 테두리를 두른 노랑 바탕에 책 제목과 지은이 이름이 검정 인쇄체로 새겨져 있다.

모두 한자(漢字)로 표기되어 있는데, 제목 ‘鶴’은 크게, 지은이 표기 ‘黃順元 著’는 작게 자리 잡고 있으며, 오른쪽에 배치된 학 그림과 어울려 매우 조화로운 느낌을 준다. 책등을 보면 세로글씨로 ‘小說集 鶴 黃順元著’라고 표기되어 있다. 뒤표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처럼 특이하게도 앞표지에 출판사 표기가 없고, 뒤표지 하단에 ‘中央文化社 刊’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이렇게 구성된 표지는 앞뒤 모두 전반적으로 학 그림이 아름답게 점령하고 있다.
학_속표지
학_속표지
다음으로, 앞표지를 넘기면 속표지가 나오는데, 위쪽에 가로쓰기 한자로 제목 ‘학’과 지은이 ‘황순원’이란 손글씨가, 아래쪽에는 목에서부터 얼굴과 머리가 붉게 칠해진 두 사람의 나란한 형상이 검정 선으로만 그려져 있다. 여기까지만 봐도 이 책의 장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다음에 이어지는 차례 부분을 보고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모두 14편의 단편 제목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두 면에 걸쳐 세로쓰기로 인쇄되어 있는데, 왼쪽 면 끄트머리에 ‘裝幀 金煥基’라고 표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황순원 소설집 『학』의 장정을 맡은 인물은 바로 김환기(1913~1974) 화백이었던 것이다. 그는 20세기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추상화(抽象畫)의 선구자였다. 우리 산천과 하늘, 달과 구름, 백자와 전통무늬 등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를 추상화하여 점, 선, 면으로 표현하는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바로 그런 작품의 특색이 『학』의 겉표지와 속표지에도 고스란히 나타난 것이었다.
김환기_머루
김환기_머루
김환기_파리
김환기_파리
알고 보면 김환기 화백은 책과 인연이 깊다. 그가 장정을 맡은 책과 잡지가 꽤 많기 때문이다. 김환기 화백은 이미 1954년 8월 문화당에서 발행한 작가 오영수(吳永壽, 1909~1979)의 작품집 『머루』의 장정을 맡았는가 하면 이듬해인 1955년 1월에 발행된 월간 《현대문학(現代文學)》 표지화도 직접 그렸다. 1962년 3월에 어문각에서 나온 김향안(金鄕岸, 1916~2004)1)의 수필집 『파리(巴里)』의 장정 또한 김환기 화백 작품이다. 김환기 화백은 평소 작가들과 친해서 술잔을 나누고 나면 장정을 맡거나 삽화를 그려주곤 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 김환기 화백의 작품은 미술시장에서 최고가를 자랑한다. 그만큼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는 까닭에 책 표지에 김환기 화백의 그림이 들어가면 당연히 가치가 상승한다. 물론 그가 장정을 맡은 작품들은 그 자체로서 이미 수준이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수록된 단편집은 김환기 그림으로 싸여 있다
황순원 소설집 『학』에는 1948년부터 1955년까지 집필된 단편소설 14편이 실려 있다. 소설집 『학』의 차례에 등장하는 작품 14편은 다음과 같다.

-소나기
-왕모래
-맹아원에서
-학
-청산가리
-참외
-부끄러움
-몰잇군
-매
-여인들
-사나이
-두메
-필묵장수
-과부
황순원의 '소나기'가 수록된 단편집은 김환기 그림으로 싸여 있다
이윽고 본문에 펼쳐지는 14편의 단편을 모두 지나고 나면 맨 끝 장에 간기면(刊記面)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는 작품 말고 서문이나 발문이 없다. 간기면도 단출해서 ‘순원’이란 한글 이름만 찍힌 인지(印紙)가 붙어 있고, 제목과 가격(500환), ‘단기 4289년 11월 20일 인쇄’, ‘단기 4289년 12월 1일 초판발행’이란 문구 아래 저자명과 발행처 ‘중앙문화사(등록 제336호)’가 모두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발행인 이름도 없다.

이 작품집의 표제작 「학」은 1953년 5월 《신천지(新天地)》 52호에 발표되었다. 표제작 「학」은 그 작품성 또한 매우 높아서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독자들의 마음은 또 다른 작품 「소나기」에 더 오래 머물렀으리라. 그렇게 될 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초판본의 차례를 넘기면 첫 번째 작품으로 「소나기」가 나온다. 작품 말미에 ‘1952년 시월’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1953년 5월 《신문학(新文學)》에 발표되었으니 아마 1952년 10월에 집필을 마친 듯하다. 나 혼자만의 감정은 아니겠지만, 그 옛날 국어 교과서에서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작품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설렜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도입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원문 그대로 옮김.)
학_소나기본문
학_소나기본문
소년은 개울 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초시네 증손자 딸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벌써 며칠째 소녀는 학교서 돌아오는 길에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는 개울 기슭에서 하더니, 오늘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하고 있다.
소녀는 개울 뚝에 앉아 버렸다.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소녀가 길을 비켜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같은 장소에서 소녀는 조약돌 하나를 주워 징검다리를 건너가서는 소년이 있는 건너편으로 조약돌을 던지며 “이 바보.”라고 외치고는 “단발 머리를 나풀거리며” “갈밭 사잇길로” 달려간다. 소년은 소녀를 숨어서 지켜보기라도 하다가 들킨 것처럼 겸연쩍어하며 소녀가 던진 조약돌을 집어 주머니에 넣는다. 이후 또 며칠 동안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소년은 주머니 속 조약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생긴다. 며칠째 보이지 않던 소녀가 어느 토요일 개울가에 나타나고, 소녀의 제안에 따라 소년은 소녀와 멀리까지 가보기로 한다. 둘은 들길을 달리며 허수아비를 흔들기도 하고, 비탈의 칡꽃을 따다 다친 소녀의 무릎에 소년이 송진을 발라주기도 한다. 소년은 코뚜레를 꿰지 않은 송아지에 올라타 소녀 앞에서 우쭐대기도 한다. 그러나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거의 무너진 원두막과 수숫단 속에서 비를 피하고, 돌아가는 길에 소년은 소녀를 업어 물이 불어난 개울물을 건네주게 된다. 그 뒤 며칠 만에 소녀는 그날 소나기를 맞은 탓에 앓았다며 핼쑥한 얼굴로 개울가에 나타나고, 소녀의 분홍 스웨터 앞자락에는 소년의 등에 업혔을 때에 묻은 검붉은 물이 들어 있다. 갈림길에서 소녀는 대추를 건네주며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소녀가 내일이면 이사간다는 날 밤, 소년은 마을에 다녀온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초판본의 「소나기」 마무리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원문 그대로 옮김.)


그날 밤, 소년은 자리에 누워서도 같은 생각 뿐이었다. 내일 소녀네가 이사하는걸 가 보나 어쩌나. 가면 소녀를 보게 될까 어떨까.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하는데,
“허, 참, 세상일두…….”
마을 갔던 아버지가 언제 돌아왔는지,
“윤초시댁두 말이 아니어. 그 많든 전답을 다 팔아버리구. 대대루 살아오든 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드니, 또 악상꺼지 당하는걸 보면…….”
남포불 밑에서 바누질감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증손자라곤 기집애 그 애 하나 뿐이었지요?”
“그렇지. 사내애 둘 있든건 어려서 잃어 버리구…….”
“어쩌믄 그렇게 자식복이 없을까.”
“글세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날 앓는걸 약두 변변히 못써 봤다드군. 지금 같아서는 윤초시네두 대가 끊긴 셈이지…….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든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구…….”
황순원의 '소나기'가 수록된 단편집은 김환기 그림으로 싸여 있다
소설집 『학』은 이처럼 우리 단편 문학사에 길이 남을 문제작을 여러 편 싣고 있지만, 그 이전부터 기실 황순원 선생은 장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실제로 황순원 선생은 장편 『카인의 후예』를 1953년 9월부터 문학잡지 《문예》에 연재하기 시작하는데, 5회를 연재할 즈음 잡지는 폐간되었지만 연재 이후의 뒷부분 내용을 따로 써두었다가 이듬해 12월 책으로 출간한다. 출판사는 소설집 『학』과 같은 중앙문화사였으며, 공교롭게도 장정 또한 김환기 화백이 맡았다.

『카인의 후예』는 결국 작가 황순원을 단편작가에서 벗어나게 해준 역작으로 평가된다. 평양에서 지주로 살던 작가 집안이 북한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서면서 해체되어야 했던 실화(實話)를 바탕으로 집필되었다고 알려진 이 작품은, 그 시기 북한의 실상을 다루면서도 토착민으로서 급박한 시대적 변화 속에 살아남기 위해 분주한 ‘오작녀’, ‘도섭 영감’ 등의 인간상을 창조하여 존재의 의미와 사랑의 가능성 등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대작으로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다.

(황순원문학촌 김종회 촌장에 따르면) 황순원 선생은 1957년부터 경희대학교에 부임하여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작품 활동을 전개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수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있었다.

이 시기 황순원 선생은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과 『너와 나만의 시간』, 『탈』,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 『움직이는 성』, 『신들의 주사위』 등을 간행함으로써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1985년에 고희 기념으로 펴낸 『말과 삶과 자유』는 수필류를 쓰지 않은 황순원 문학에서는 보기 드문 산문집으로, 그의 인생관과 함께 문학관, 미래관 등을 엿볼 수 있는 짧은 산문들이 실려 있다. 이 산문집을 통해 선생의 자기 작품에 대한 생각, 특히 문학인생 초기에 쓴 시들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으니, 다음과 같은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못해 서슬이 퍼렇다.

나는 판을 달리할 적마다 작품을 손봐 오는 편이지만, 해방 전 신문 잡지에 발표된 많은 시의 거의 다를 이번 전집에서도 빼 버렸고, 이미 출간된 시집 『방가』에서도 27편 중 12편이나 빼 버렸다. 무엇보다도 쓴 사람 자신의 마음에 너무 들지 않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읽힌다는 건 용납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빼버리는 데 조그만치도 미련은 없었다. 이렇게 내가 버린 작품들을 이후에 어느 호사가가 있어 발굴이라는 명목으로든 뭐로든 끄집어내지 말기를 바란다.
- 황순원, 『말과 삶과 자유』 중에서


이처럼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본인의 작품이 대중들에게 읽히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마치 법정스님이 유언으로 당신의 모든 책을 거둬들이라고 당부한 일이 떠오른다. 아마도 순수문학에 대한 선생의 결벽성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리라.
사진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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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추억 하나. 대학 재학시절 우리는 ‘문학회’라는 이름으로 봄과 가을이면 캠퍼스에서 시화전을 열곤 했다. 그때마다 황순원 선생님은 조용히 찾아와 작품들을 둘러보시고 방명록에 격려의 말씀을 적어주시는 한편, 막걸리라도 한 사발씩 하라며 찬조금을 내놓곤 하셨다. 당시 선생님은 문학도가 아니더라도 우러르는 우상 같은 존재였다. 아니, 그 존재 자체가 우리 자랑이었다.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 다녀온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선생께서는 안 계시지만, 생전에 강단에서 온화한 미소로 우리 학생들을 내려다보시던 그 모습은 여전히 소나기마을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전시실에 남아 있는 육필원고를 비롯하여 만년필, 책상 등에서 선생님의 체취가 오롯이 느껴졌었다. 그런데 소나기마을은 왜 양평군에 조성된 걸까.

그 단서는 작품 속에 나오는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는 표현 속에 담겨 있다. 이를 근거로 양평군과 경희대가 힘을 합쳐 소나기마을을 조성했다고 한다. 황순원 선생님께서 평생을 바쳐 세상에 남기신 순수문학에의 열정이 대대손손 이어질 수 있도록 후배 문인들을 축복해 주시리라 믿으며, 선생님 내외분의 평안한 영면을 빈다.
1) 본명은 변동림(卞東琳)이며, 수필가이자 미술평론가, 화가로 활동했다. 시인 겸 소설가 이상(李箱)과 결혼하기도 했었지만, 이상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결혼 생활은 4개월 만에 끝났다. 이후 1944년 화가 김환기와 재혼했다. 김향안이란 이름은 김환기 화백이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