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은 괴물 아닌 과학자 이름, 괴물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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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이 단어를 들으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나요. 머리에 박힌 나사못, 거대한 몸집과 헝겊인형처럼 바느질로 기운 초록색 피부 같은 걸 상상하기 쉽죠.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 괴물의 이름은 프랑켄슈타인이 아닙니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소설을 영화로 옮긴 작품으로 더 유명합니다. 제임스 웨일 감독이 만든 영화 '프랑켄슈타인'(1931) '프랑켄슈타인의 신부'(1935)가 소설에 대한 오해를 낳았습니다. 영화 포스터에 등장한 초록빛 피부 인조인간이 워낙 인상적이라 '프랑켄슈타인'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돼버렸죠.
프랑켄슈타인은 괴물 아닌 과학자 이름, 괴물의 이름은?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포스터

소설 속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아닙니다. 인간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내기를 꿈꿨던 괴짜 괴학자의 이름이에요.

소설은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들어 있는 액자 구조예요. 편지로 시작합니다. 편지를 쓴 사람은 북극 항로를 개척하려는 영국 청년 로버트 월턴. 월턴은 항해 중 배가 얼음에 뒤덮여 갇혀버려요. 그러다 얼음 조각을 타고 떠밀려 온 한 남자를 구조하죠. 남자는 자신에게서 도망친 누군가를 잡기 위해 방랑 중이래요. 이 남자의 이름이 바로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입니다.

소설은 프랑켄슈타인이 들려준 기이한 이야기를 월터가 기록해 누나에게 전해주는 형식을 띠고 있어요. "이 편지가 누님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만날 가능성이 크지만 워낙 이상한 사건을 겪은 터라 기록으로 남겨야겠어요."

프랑켄슈타인은 제네바 공화국의 귀족으로, 과학자를 꿈꾸며 독일로 유학을 갔죠. 그러다 '인간을 창조한 인간'이 되겠다는 발칙한 꿈을 꿉니다. 여러 사람들과 동물의 시체를 짜깁기해 키 2m 40cm의 거대한 '창조물'을 만들죠.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새벽 1시.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창조물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누렇고 쪼글쪼글한 얼굴에 거무스름한 입술. 막상 살아 숨쉬는 창조물을 마주하니 프랑켄슈타인은 혐오감을 느낍니다. 이름조차 붙여주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도 시종일관 '창조물' 혹은 '괴물'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 아닌 과학자 이름, 괴물의 이름은?
영화 '프랑켄슈타인' 속 한 장면.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의 무시 속에 집을 떠나요. 다시 나타난 그는 흉측한 외모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을 증오한다고 하소연합니다. 그간 겪었던 고난과 고독을 털어놓으며, 가족을 갖고 싶다고 말해요. "나처럼 끔찍하고 흉한 여자라면 나를 밀어내지 않을 거야. 나와 같은 부류, 나와 같은 결함을 가진 동반자가 필요해. 그런 존재를 만들어줘."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가족을 해칠까 두려워 괴물 아담과 짝지어줄 괴물 이브를 만듭니다. 그러다 도중에 찢어버립니다. "어쩌면 이 여자 마귀는 제 짝보다 수천 배 더 악독해서 살인과 참혹한 행위를 더욱 즐길지도 모를 일이었지요."

분노한 괴물은 "네 결혼식 날 밤에 찾아가겠다" 경고를 남긴 채 떠나요. 이후 프랑켄슈타인의 친구 앙리, 신부 엘리자베트를 죽입니다. 이후 복수심에 괴물을 찾아헤매던 프랑켄슈타인은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 월턴에게 발견된 것이었죠.

프랑켄슈타인이 세상을 떠난 뒤 월튼은 그의 시신 앞에서 비통해하는 괴물을 발견합니다. 괴물은 세상에 다시는 자신 같은 존재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불타서 사라지겠다며 배를 떠나죠.

오늘날 'SF의 효시'로 불리는 이 소설은 '인간이 창조주가 됐을 때, 그 결과물을 인간이 완벽하게 예상하거나 통제할 수 있을까' 하는 공포스러운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AI) 등 기술이 발전돼갈수록 이 소설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죠. 전북도립미술관은 오는 28일부터 인간과 기계의 공존에 대한 특별전 '미안해요, 프랑켄슈타인'을 개최해요. <프랑켄슈타인>을 재해석한 소설 <가여운 것들>은 엠마 스톤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져 곧 개봉됩니다.

"모든 인간이 나에게 죄를 지었는데 왜 나만 죄인으로 몰려야 하지?" 괴물은 떠나기 전에 묻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혐오와 낙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죄짓지 않은 존재가 겉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된 끝에 (사람들의 편견대로) 악행을 저지르는 악순환이 벌어지죠. 소설 속에서 괴물에게 유일하게 따뜻하게 대해준 존재는 앞 못 보는 노인 '드라세'입니다.

저자의 남편이기도 한 영국 시인 퍼시 비시 셸리는 이 작품의 교훈이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 사악해진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사회에 이바지하거나 세상에 빛을 더해줄 자질이 충분한 사람들이 우연한 계기로 경멸의 대상으로 낙인찍혀 멸시와 고독 속에서 결국 골칫거리로, 저주받은 낙오자로 전락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괴물에게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다는 건 의미심장해요. 아무도 그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니까요. 그 결과, 우리는 아직도 그의 정체를 잘못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이름이 없는 건 괴물뿐이 아니었습니다. 저자 메리 셸리는 1818년 1월에 런던에서 익명으로 이 소설을 출간합니다. 당시 셸리의 나이는 18살. 시인 바이런 등 친구들과 함께 별장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씩 짓는 놀이를 하다가 소설을 구상했어요. 어린 여성이 책을 내기 힘든 사회적 분위기 탓에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가 뒤늦게 정체가 알려지자 "어린 여성이 어떻게 이렇게 해괴한 이야기를 썼느냐"는 얘기를 들었죠.

지금에 와서 보면 '어린 여성 작가가 괴담을 썼다'고 비판하는 당시 분위기가 괴담처럼 공포스럽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미지의 존재, 그 잠재력을 다 가늠할 수 없는 존재를 무턱대고 배척하는 게 아닐까요. 셸리는 훗날 개정판 서문에서 자신의 이름과 집필 배경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어요. "발명도 창작도 특정 대상의 가능성을 포착하는 능력, 대상에 관한 발상이나 느낌을 주무르고 단련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