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니 社는 미국의 보석 장신구 브랜드로 알려졌지만, 사실 정통성에 관한 담론에서 은제품(銀製品) 제작과 유리 작업을 제외할 수 없다. 찰스 루이스 티파니(Charles Lewis Tiffany, 1812-1902)와 J. B. 영(J. B. Young)이 공동 창립한 티파니 社는 1837년에 뉴욕에서 문구류와 선물용 제품을 판매하는 소매상으로 시작해, 10년 후 은제품 부서를 추가했다. 1880년경에 이르러 이 회사는 국제적 명성을 가진 장식미술 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

성공 뒤에는 정치 경제적 원인도 있었다. 1842년 미국 정부는 유럽산 은제품을 포함한 수입품에 40%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미국 내 은공예품 생산이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859년 네바다 주에서 광대한 콤스톡 광맥(Comstock Lode)이 발견되면서 은 가격이 급격히 하락했고, 은제품 구입의 문턱이 낮아졌다. 이에 더해 남북전쟁 종료 후 경제가 급성장해 커피, 차와 같은 기호 식품을 문화적 취미로 즐길 수 있게 되자 이와 관련한 은제품 수요도 증가했다. 나아가 미국 은제품 제조사가 관련 신기술과 공장 시스템을 빠르게 수용했다는 점도 19세기 말 티파니 社와 같은 은제품 제조사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영원의 약속 '티파니'…모든 건 200년 전 '실버'에서 시작됐다
티파니 社의 발전 과정은 박람회에 출품했던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각국의 경제력과 기술력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펼쳐진 전시를 위해 티파니 社에서는 어떤 작품을 출품했을까?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였으며, 어떤 기술을 적용했나? 기술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심미적인 면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을까? 그리고 이들 작품은 티파니 社의 전통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모레스크 패턴의 차와 커피 서비스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

티파니 社는 은제품 생산의 전문성을 높이고자 뉴욕의 은세공사이자 기업가였던 존 무어(John C. Moore, c. 1803-1874)와 1851년 독점 계약을 맺었다. 존 무어는 19세기 초반부터 로코코 리바이벌과 같은 프랑스풍 은제품을 생산, 판매했었는데, 사실 티파니 社의 성공은 그의 아들 에드워드 무어(Edward Chandler Moore, 1827-1891)의 노력에 기인했다. 에드워드 무어는 일본 칠기, 이슬람 유리, 중동 및 극동 타일과 직물, 유럽 도자기를 열성적으로 수집했고, 건축, 원예, 야금술에 관한 방대한 자료도 모았다. 그는 1850년대 초부터 티파니 社 은제품 부서의 책임자였고, 19세기 후반까지 각종 박람회 출품을 진행했다. 무어는 자신의 아카이브를 토대로 일본, 이슬람 모티프를 적용한 제품을 디자인했는데, 이 일련의 은공예품들은 문화적 산물로서의 은공예에 관한 무어의 독특한 시각을 반영했다.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미국의 장식 예술은 호화로운 이국적 양식을 점점 더 많이 반영하고 있었다. 티파니 社가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Paris Exposition Universelle)에 출품했던 “모레스크(Moresque)” 패턴을 적용한 차와 커피 서비스 세트도 그러한 경향을 대변하는 작품이었다. 이는 영국의 건축가이자 이론가였던 오웬 존스(Owen Jones, 1809-1874)의 1837년 저서 『알람브라 궁전의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와 세부 사항, Plans, Elevations, Sections, and Details of the Alhambra』에 수록된 도판에서 패턴을 차용했으며 박람회에서는 동메달을 수상했다.

시인의 삶을 기념하는 브라이언트 화병 (1876년 필라델피아 박람회)

영원의 약속 '티파니'…모든 건 200년 전 '실버'에서 시작됐다
브라이언트 화병, 1876, 은과 금, 디자인: 제임스 홀턴 화이트하우스,
제조: 티파니 앤 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

9년 후 열린 1876년 필라델피아 박람회는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국가적 행사였다. 티파니 社는 시인이자 신문 편집자였던 윌리엄 컬런 브라이언트(William Cullen Bryant, 1794-1878)의 80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지인들이 주문했던 은제 기념 화병(The Bryant Vase)을 이 박람회 주요 전시물로 출품했다. 높이 85cm에 이르는 이 장대한 은공예품의 기본 형태는 그리스 도자기 화병에서 차용했고, 표면 장식의 패턴은 르네상스 리바이벌을 따랐다.

브라이언트는 자유 무역, 노동자 인권,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고, 종교적 소수자와 이민자를 옹호했던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이를 반영하듯 이 화병의 표면에 시인의 생애를 시간 순으로 보여주는 도안을 중심으로 만개한 사과꽃 이미지를 정교한 체이싱(chasing) 기법으로 세밀하게 구현했다. 두 종류 이상의 역사적 장식과 브라이언트의 삶의 여정을 하나의 기물에 조화롭게 표현했는데, 이러한 복합 구성 방식은 티파니 社의 은공예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미국에서 제작된 일본풍 은공예품 (1878년 파리 만국 박람회)

사실 티파니 社의 은공예품과 관련한 발전사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박람회는 1878년 파리 만국 박람회(Paris Exposition Universelle)였다. 티파니 社는 주요 전시물 중 하나로 일본풍 은제품을 출품했다. 1850년대 일본 개항 이후 세계 박람회에 일본 예술품이 등장하면서 미국에서도 일본 물건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다. 티파니 社가 1877년 영국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드레서(Christopher Dresser, 1834-1904)에게 의뢰해 구입했던 8000점에 이르는 일본 공예품은 이러한 일본풍 은제품 유행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티파니 社의 은제품을 살펴보면 일본 공예품을 단순히 복제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미적 감성을 미국의 공업 기술로 재구성했다 평가할 수 있는데, 그 예로 찰스 오스본(Charles Osborne, 1847-1920)이 디자인한 초콜릿 주전자를 들 수 있다. 기물 표면의 풍부한 붉은색 파티나(patina)는 혁신적 화학 공정을 적용해 수없이 실험한 결과였다. 이 주전자 부리를 감싸고 있는 부분은 체이싱 기법으로 제작했고, 가재와 게의 사실적인 형상은 정밀 주조 기법(lost wax casting)으로 제작한 후 기물의 표면에 아플리케(applique) 기법으로 땜했다. 주전자 몸통 상부는 고난도의 절상감(切象嵌) 기법으로 장식했다. 메리지 기법(Marriage of Metal)으로도 불리는 이 기법은 금속판을 세공톱으로 잘라낸 후 그 부분에 동일한 형태의 다른 금속을 끼워 넣고 땜을 하는 표면 장식기법이다.

이러한 신기술과 전통적 공예 기법을 동시에 적용했던 티파니 社의 일본풍 은제품에 관해 드레서는 “내가 아는 은세공인은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의 산업에 적용되는 예술의 진보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 하지만 당신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그러한 진보를 이룬 은세공인이라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영원의 약속 '티파니'…모든 건 200년 전 '실버'에서 시작됐다
커피 포트, c. 1867, 은과 금, 디자인: 에드워드 챈들러 무어,
제조: 티파니 앤 코, 뮤지엄 오브 파인 아트 휴스턴 소장.

웅장함의 극치, 맥케이 만찬 세트 (1878년 파리 만국 박람회)

1878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티파니 社가 은공예품 부문에서 금메달 획득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작품은 웅장하고 호사스러운 맥케이 서비스(Mackay Service), 은제 만찬 세트였다. 이 장대한 만찬 세트가 전시되었을 때, 규모와 화려함, 세공 기술 면에서 모두를 압도했다. 이 만찬 세트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센터피스, 펀치 볼, 29 등 촛대 한 쌍, 살롱 램프 한 쌍, 42피스의 서빙용 그릇 및 기물들, 레드 와인용 주전자, 커피, 차, 그리고 초콜릿 주전자 및 관련 잔 세트, 24개의 수프 접시, 아이스크림 그릇, 소금 및 후추통, 그리고 스푼, 포크, 나이프 등을 포함하는 900여 개 플랫웨어 세트(flatware set). 총 24명을 동시에 대접할 수 있는 구성이었다.
영원의 약속 '티파니'…모든 건 200년 전 '실버'에서 시작됐다
초콜릿 포트, 1879, 은, 녹청색 구리, 금, 상아, 디자인: 찰스 오스본,
제조: 티파니 앤 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
영원의 약속 '티파니'…모든 건 200년 전 '실버'에서 시작됐다
콤스톡에서의 채굴, c. 1877, 석판화, 미국 국회 도서관 소장. www.loc.gov/item/93506798/

이 만찬 세트를 티파니 社에 의뢰했던 사람은 아일랜드계 미국인 사업가 존 윌리엄 맥케이(John William Mackay, 1831-1902)로 아내 마리 루이스 맥케이(Marie-Louise Mackay, 1844-1928)를 위해서였다. 그는 미국에서 발견된 가장 큰 광맥인 네바다 주 콤스톡 광산을 공동 개발, 소유했던 네 사람 중 하나였다. 이들은 버지니아 은광 회사(Consolidated Virginia Silver Mine)를 조직해 광산 운영에 관여했다.

이 광맥의 은 채굴량의 절정기는 1870년대였고, 회사의 주식 폭등으로 이들의 재산은 1875년경 폭증했다. 이들은 실버 왕(Silver Kings)으로 불리며 엄청난 부를 축적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되었다. 맥케이는 이 특별한 프로젝트를 위해 콤스톡 광산에서 뉴욕 티파니 본사로 500kg이 넘는 은을 보냈다. 박람회 종료 후 맥케이는 파리에 위치했던 자신의 맨션에서 이 만찬 세트를 수령했다. 이후 맥케이 부인은 런던과 파리에 위치한 저택에서 왕족과 귀족들을 위한 파티를 열 때 이 은제품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이 장대한 은 공예품은 어떤 과정을 통해 제작되었나? 이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는 에드워드 무어였고, 실무자는 수석 세공사였던 찰스 그로장(Charles T. Grosjean, 1841-1888)이었다. 이 만찬 세트는 약 1,250 피스로 구성되었으며, 40여 명의 프랑스, 영국, 독일 출신의 은세공사가 2년에 걸쳐 작업했다. 표면 장식 디자인은 아일랜드 토끼풀, 스코틀랜드 엉겅퀴, 자두, 모란, 석류, 데이지, 양귀비, 국화, 스위트 윌리엄스, 아이리스 등이었다.

티파니 社는 이 극도로 장식적인 프로젝트를 위해 돋을새김 기술자의 노동력이 절실했다. 그러나 숙련된 세공가가 턱없이 부족했기에 실무자들은 작업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첫 번째는 에칭 기법이었다. 에칭은 필요한 부위만 방식 처리를 한 후 화학적으로 부식시켜 원하는 모양을 얻는 기법이다. 이를 적용해 금속 표면에 장식 도안의 밑그림을 그리는 방법으로 작업의 효율성을 높였다. 두 번째 방법은 체이싱 기법을 구현한 원본으로 형(型)을 만들어 기술력이 높아진 정밀주조 기법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가 1878년 완료되었을 때, 맥케이는 이 패턴이 복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금형까지 매입했다.

우아한 티파니 스타일 목련 화병 (1893년 시카고 콜롬비아 세계 박람회)

1878년 맥케이 만찬 세트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소위 티파니 스타일로 불리는 독특한 에나멜 기법이 처음 시도되었다. 에나멜링은 곱게 정제한 색색의 유릿가루를 구리나 은, 금과 같은 금속판 위에 뿌린 후, 약 750도에서 850도 정도 가마의 열로 용융시켜 원하는 색 표현을 얻는 역사 깊은 표면 장식 기법이다. 19세기에 들어서는 발전한 산업 기술 덕분에 욕조, 조리 도구와 같은 상대적으로 큰 기물에도 적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티파니 社의 에나멜링은 무광택의 부드러운 파스텔 색상을 조화롭게 표현하는 등 수준 높은 심미성을 확보했기에 특별했다.

1893년 시카고에서 열렸던 콜롬비아 세계 박람회 출품작 목련 화병(Magnolia Vase)과 관련해서는 티파니 스타일 에나멜링의 완성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비평가들은 이 은제 화병이 "예술적 아름다움과 본질적 가치 면에서 개별 기업이 보여준 것 중 가장 위대한” 작업이라고 찬미했다. 화병의 전체적인 형태는 푸에블로(Pueblo) 인디언 도자기로부터, 화병 상단의 손잡이는 남미 톨텍(Toltec) 모티프로부터, 그리고 표면의 식물 장식은 목련을 중심으로 미국 자생 식물 이미지를 차용했다. 이는 당시 미국에서 만들어진 여러 작품에서 강하게 드러났던 자연주의적 경향, 나아가 국가적 정체성을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영원의 약속 '티파니'…모든 건 200년 전 '실버'에서 시작됐다
목련 화병, ca. 1893, 은, 금, 에나멜, 오팔, 디자인: 존 T. 커렌, 제조: 티파니 앤 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

그릇을 보석처럼! 은제 화병 (1900년 파리 엑스포)

에드워드 무어의 지휘봉을 물려받은 사람은 폴딩 판햄(G. Paulding Farnham, 1859-1927)이었다. 그는 세기 전환기의 스타였다. 판햄은 장신구 디자인에서 먼저 재능을 드러냈는데,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위해 제작했던 금으로 만든 에나멜링 난초 브로치는 식물학적 정확성 뿐 아니라 자연주의적 감성을 정교하게 표현해 미국 회사로는 처음으로 티파니 社가 주얼리 분야의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판햄은 1893년 시카고 콜롬비안 엑스포(Columbian Exposition in Chicago)와 1900년 파리 세계 엑스포(Paris Exposition Universelle)에 출품하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 예술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은공예품 연작을 제작했다. 그 중 하나는 나바호(Nabajo) 도자기 형태로 만든 은제 화병이었는데, 장식하는 방식이 매우 독창적이었다. 난집 셋팅과 같은 장신구 제작 기법을 기물 장식에 적용했는데, 마름모, 타원형, 그리고 나뭇잎 형태의 난집 안에 아메리카 터키석과 아마존 스톤(Amazon stones)같은 준보석을 셋팅 했다. 옥수숫대를 닮은 손잡이 부분에는 322개의 아메리칸 담수 진주를 셋팅 했다. 이는 실버스미싱(silversmithing)이라는 유럽식 은기 제작기법으로 제작한 몸체에 터키석, 담수 진주와 같은 신대륙의 재료로 원주민 문화의 패턴 장식을 보석을 다루듯 장식했다는 점에서 다문화적이고,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19세기 후반 박람회용 은공예 작품을 디자인, 제작하는 과정에서 티파니 社는 산업 예술 분야의 기술적, 심미적 성취를 이뤄냈다. 전통적 공예 기술이 산업적 기술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통해 독창적 작품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은은 풍요로운 삶을 상징하는 것 같다. 베이비 스푼과 같은 사물에서 우아한 저녁 만찬을 완성하는 은 식기류, 은촛대, 티 서비스, 그리고 세계적 스포츠 대회의 우승컵까지. 특별한 경험과 은으로 만든 사물의 상호작용은 덕분에 여전히 유효하다.
영원의 약속 '티파니'…모든 건 200년 전 '실버'에서 시작됐다
화병, 1900, 은, 은도금, 담수 바로크 진주, 아마조나이트, 오팔, 디자인: 폴딩 판햄,
제조: 티파니 앤 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


참고자료
Loring, John, Magnificent Tiffany Silver, Harry N. Abrams, New Yor, 2001.
David B. Warren, Michael K. Brown, Elizabeth Ann Coleman, and Emily Ballew Neff. American Decorative Arts and Paintings in the Bayou Bend Collection. Houston: Princeton Univ. Press, 1998.
Wees, Beth Carver. “Nineteenth-Century American Silver.” In Heilbrunn Timeline of Art History. 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0–. http://www.metmuseum.org/toah/hd/aslv/hd_aslv.htm (October 2004)
Venable, Charles L. Silver in America, 1840–1940: A Century of Splendor. Exhibition catalogue. Dallas: Dallas Museum of Art, 1995.
Tiffany & Co. Archive
https://press.tiffany.com/our-story/a-legacy-of-sterling-sil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