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오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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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코난의 맛있는 오디오
애플 컴퓨터를 통해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를 열어젖힌 스티브 잡스는 이후 매킨토시로 출판계에 혁신을 이뤄냈다. 픽사에선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시대를 몇 발자국 더 진보시켰다. 하지만 그의 전성시대는 아직 시작도 안했다. 아이팟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이팟은 아이폰의 전작이었다. 아이팟은 음악을 물리매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고 불법 유통의 그늘에서 음악을 구했다.협상 테이블엔 소니, 유니버설뮤직 등 세계적 메이저 음반사 대표들이 줄지어 앉았고 스티브 잡스라는, 당시 젊은 IT 기업 사업가 한 명이 설득하는 와중이었다. 피지컬 포맷 시장에서 음원 시장으로 연착륙하지 못하고 불법으로 유통되던 음원을 아이튠즈를 통해 유통해보고자 하는 스티브 잡스의 설득은 통했다. 2000년대 초반 감옥 같던 DRM으로부터 탈출한 음원은 범세계적인 음원 플랫폼 아이튠즈로 몰렸다.
음악을 집어삼킨 아이팟은 아이폰 출시의 주춧돌이었다. 아이폰은 이후 음반과 오디오, 시계, 카메라, 네비게이션 등 그 이전 세대의 여러 필수품들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그 시작은 음악이었다. 아이팟이라는 이 작은 음원 플레이어가 스티브 잡스가 바랬던 꿈을 담았다. 그의 꿈은 무엇일까? 손 안의 작은 명품 같은 디자인, 뛰어난 음질은 스티브 잡스의 안목과 취향 그리고 음악과 음향에 대한 집요한 사랑의 산물이다.
그 증거가 될 만한 사진 한 장이 있다. 바로 캘리포니아 우드사이드의 산악 지대에 있는 어느 저택에서 머그컵을 들고 앉아 있는 사진이다. 사진을 찍은 작가는 다이애나 워커. 뭔가 공허해 보이는 마룻바닥 위에 의자 없이 앉아 있고 조명만이 환하게 그를 밝히고 있다. “이 사진은 나의 일상적인 시간을 표현한 것입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찻잔과 전등 그리고 스테레오 음향기기 뿐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이 사진에 대한 남긴 멘트라고 한다. 일반인이라면 그저 그의 한가로운 여가 중 한 순간 정도로 이 이미지를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오디오 마니아라면 그의 그림자가 머무는 뒤 공간에 가슴이 뛸지도 모른다. 턴테이블과 프리앰프 그리고 옆으로 보이는 스피커 말이다. 이 사진이 1982년에 찍은 것을 감안할 때 당시 이 시스템은 꽤 값비싼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이었다. 그가 음악과 오디오 시스템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그냥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마니아였다는 걸 알려준다.
그의 시스템에 대해 알아보는 일은 무척 즐겁다. 우선 스피커는 당시 유행하던 정전형 스피커다. 앰프가 내장된 액티브 스피커도 아니지만 전원을 공급받아 소리를 내는, 이른바 정전형 스피커로서 어쿠스탯(Acoustat)이라는 브랜드의 ‘모니터 3’이라는 스피커다. 당시 아포지, 마틴 로건 등 정전형 스피커의 유행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특별한 선택이다. 물론 먼 훗날 그는 나중에 윌슨 오디오 Grand Slamm 등 하이엔드 스피커를 사용하지만 1980년대 청춘임을 감안하면 꽤 많은 예산을 오디오에서 투자했던 것.
한편 앰프로 눈을 돌리면 전통의 명문가 스레숄드 구형 모델이 눈에 들어온다. 이건 개인적으로도 사용해본 브랜드라서 그 음질이 떠오를 정도로 반갑다. 프리앰프는 FET-One, 파워앰프는 Stasis-1 파워앰프다. 특히 Stasis-1은 모노블럭 파워앰프로서 8옴(Ω) 기준 200와트 출력을 내는 앰프로 출시 시기가 1979년임을 감안하면 당시 파격적인 하이엔드 앰프였다. 과연 저 스피커에 이 정도 대출력 모노블럭 앰프가 필요했을까? 아마도 최저 1옴까지 떨어지는, 악명 높은 아포지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 정전형 스피커가 그렇듯 대출력에 높은 힘이 필요했을 것 같다.
mono_power_amplifier
한편 소스 기기로 넘어가면 오직 턴테이블만 덩그러니 앰프 옆에 놓여 있다. 마치 맷돌처럼 둥근 베이스 위에 엘피가 빙글빙글 돌아갈 것만 같은 모습이다. 이 턴테이블의 이름은 자이로덱(Gyrodec)으로 커다란 성공으로 이후 발매되는 자이로덱 시리즈의 효시가 된 모델이다. 자이로덱은 존 미셸이 설립한 미셸 엔지니어링이 설립한 영국 브랜드로서 턴테이블은 물론 정밀 기계 등을 만드는 곳이었다. 흥미로운 건 이 턴테이블을 만든 존 미셸은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우주선 ‘디스커버리’를 제작한 사람이다. 그리고 당시 이 디스커버리는 자이로덱 디자인의 영감이 되었다.
michelle gyrodec
필자는 오디오 평론가로 활동하지만 여전히 한 명의 오디오 마니아로 살아간다. 따라서 여러 지면이나 인터넷 기사 등에서 종종 다른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듯한 사진에서 오디오에 주목하게 된다. 일종의 직업병 같은 것이다. 때론 연예인이나 사업가 등 유명인들의 오디오 시스템이 소개되기도 해서 재밌다. 잘 세팅된 오디오 시스템도 있지만 즐겨 듣는 음악 취향이나 하드웨어의 매칭에 대한 고민 없이 돈으로 쓸어 담은 듯한 오디오 시스템도 보인다. 그러다가 스티브 잡스의 시스템을 보면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는 엄청난 음악 마니아였으며 또한 오디오 마니아였다는 게 이 낡은 사진 한 장에서도 자연스레 드러나기 때문이다.영화 ‘스티브 잡스’를 보면 스티브 워즈니악이 잡스에게 항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신이 할 줄 아는 게 뭐냐고. 개발은 엔지니어가 하고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하는데 당신은 하는 게 무엇이냐고. 스티브 잡스는 대답한다. 당신들은 그저 오케스트라의 한 단원에 불과하다. 그저 맡은 자리에서 열심히 연주하는 뛰어난 연주자다. 하지만 나는 연주자를 연주하는 사람, 바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존재라고. 아이팟은 애플 신화, 아니 스티브 잡스라는 전설의 서막이었다. 그에게 지휘자 같은 능력을 주어 아이팟 같은 걸 만들게 만든 힘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아마도 음악과 오디오에 대한 집념과 사랑이 자리하고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