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과 노원을 오고 가던 4년 차 월급쟁이.
출퇴근길이 서서히 버거워질 무렵, 기회가 닿아 부모님을 설득해 분가를 결심했다.

운 좋게도 서울 시내가 잘 보이는 조용한 동네, 작은 신축빌라에 입주하게 되었다.

신축 빌라답게 밝은 LED 백색 형광등 아래 화사한 색의 벽지로 꾸민 집이었지만, 가구 하나 포함되지 않았던 전셋집이었기에 채워야 할 공간이 많고 낯설게 느껴졌다.

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사물을 찾아 나섰다.

때묻지 않은 밝은 공간이었지만, 왠지 ‘경제적’으로 지어진 뭔지 모를 이 가벼운 기운을 눌러주고 싶었다.

이런 내 심정이 너무 잘 드러났던 걸까…
왜 우리는 '그 옛날 LP'에 빠져있을까…바이널 디깅의 세계
손자의 독립을 축하하며 전세 계약과 함께 처음으로 집을 구경하러 오신 할머니.
모든 집에는 중심이 되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조언과 함께, 집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공간을 지목하셨다.

그리곤 이 공간에 어울릴 가구 하나를 기부하겠다고 제안하셨다.

그것은 바로 전통 반닫이*였다.

강화반닫이와 김종규 씨 그림.GIF
강화반닫이와 김종규 씨 그림.GIF
(*반닫이는 과거 조선시대에서 안방, 사랑방, 대청 또는 광이나 다락 등 많은 주거 공간에서 다양하게 쓰인 목재 수장가구로, 먼 친척 어르신 댁에 있을 법한 친근감이 느껴지는 가구이기도 하다. 사전적 의미는 “앞의 위쪽 절반이 문짝으로 되어 아래로 젖혀 여닫게 된 궤 모양의 가구”이다.)

기억을 되짚어봤다.

첫 기억은 유치원 입학 전 지난 은행 달력 이면지에 낙서를 했던 할머니 댁 거실.

그때부터 텅텅 비어있는 나의 첫 전셋집 거실까지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 최소 10번이 넘는 이사를 했다.

하지만 이토록 거실이란 공간은 매번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스피커에서 클래식 라디오나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시간을 따라 엘피, 카세트, CD, 이제는 유튜브로 스트리밍까지 재생 가능한 스마트 스피커까지 기기는 바뀌었지만, 이 공간에는 항상 음악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던 음악으로 난 여백을 채우기로 했다.

할머니의 반닫이 위 나만의 쇼케이스 1호는 결국 ‘턴테이블 플레이어'로 선택했다.

이렇게 친숙한 가구와 물건, 그리고 가장 음악으로 나의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바이널 디깅’의 묘미는 무압축 음질로 음악 스트리밍까지 할 수 있는 요즘 세상에서 엘피는 지극히 불편한 기기일 수 있다.

어지간히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그저 공간만 차지하는 과거 향수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각자 짧고 긴 삶을 살면서 잠시라도 감정을 적셔본 노래 한 곡이라도 있다면 턴테이블에 투자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이제 자취를 시작한 지 어느덧 3년 반. 지난 주말에도 동대문과 을지로 뒷골목에 숨어있는 LP 가게를 찾아 나섰다. LP 대중화가 시작한 40년대부터 80년대 카세트의 등장까지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명반이 나왔으니, ‘바이널 디깅(vinyl digging)*’은 로또 1천 원 당첨보다는 승산이 높은 보물찾기 게임이 아닌가.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바이널 디깅(혹은 크레이트 디깅)은 DJ나 음악 애호가가 새로운 음악을 발견하거나, 드문 음반을 찾기 위해 음반가게, 벼룩시장 등에서 음반을 뒤지며 찾는 활동을 뜻한다.)

엘피 가게에서 음반 못지않게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은 다름 아닌 가게 사장님이다.

10년 넘도록 ‘폐업 정리’ 자필 팻말을 붙여놓은 을지로 지하상가 사장님부터 우연히 한국과 연이 닿아 광희문 뒷골목에서 애플민트향 가득한 모로코 홍차를 판매하는 외국인 사장님까지 각자의 사연은 정말 다양하다.

그래서인지 사장님이 추천하는 음반은 더욱 신비롭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최근 몇 년 사이에 LP 가게를 방문하는 평균 연령대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것 같다.

모 음반 판매 사이트에서도 LP 판매 증가율이 3년째 연속으로 상승세라는 자료를 최근 냈다. 기사에서는 LP를 소비자의 덕심을 자극하는 젊은 열성 음악팬들의 굿즈로 정의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음악을 ‘소유’할 수 없는 요즘, LP는 덕심을 표출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다.

이는 마치 어릴 적 짝사랑이 혹시나 내 미니홈피를 방문할까 내심 기대하며 선곡에 심혈을 기울였던 이전 감성과도 접점이 있는 것 같다.

반면 지금 내 카톡 프로필 화면에 있는 작은 플레이리스트는 요금제를 쓰지 않아 미리 듣기 밖에 안되고, 아끼는 플레이리스트를 특별한 그(녀)에게 보내고 싶어도 다른 플랫폼을 사용하지 않아 공유를 할수 없는 등 기술적 번거로움에 부딪혀 버리고 만다.

그런 면에서 LP의 멋진 엘피 앨범 커버는 이미지 기반 소셜 네트워크로 공유하고 덕심을 인증하기 너무 편리하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요즘, 비좁은 도심 속 5평짜리 오피스텔에도 모던 미드 센추리 콘셉트의 선반과 바이널 플레이어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있는 이유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닐까.

LP 구매를 고려중인 분들에게.

턴테이블 플레이어를 막 구매했거나 아직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분들에게 몇 가지 제안을 드려본다.

우선 집에서 가장 돋보이는 중심이 될 공간을 확보하자.

이 공간에서 음악을 재생하고, 촬영하고, 같이 라면 먹을 친구한테도 자랑할 공간인 만큼 내가 우선 내가 마음에 들어야 한다.

플레이어가 위치한 이 공간은 바쁜 하루를 마치고 한껏 여유 부려도 죄책감 들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전구색 조명을 배치해 천장 등을 끄고 시선을 집중해 보는 것도 추천한다.

다음은 턴테이블 플레이어와 스피커이다.

모든 음향장비가 그렇듯,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처음부터 눈을 높일 필요는 없다고 조언하고 싶다.

다행히도 요즘 판매되는 신형 플레이어는 전원만 꽂으면 바로 재생할 수 있다.

호기심에 시작했다가 금세 흥미를 잃은 이웃 주민도 있으니 당근에서도 열심히 찾아보자.
스피커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스트리밍 서비스과 확연히 나는 음질 차이를 체험해 보려면 개인적으로는 스피커에 조금 더 투자할 것을 추천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습관과 의식이다.

음원 스트리밍 시대 속에서 매번 세 번째 곡이 끝날 때마다 침대나 소파에 널브러진 나 자신을 일으켜 바이널 판을 뒤집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TV의 화면에 지배당하는 세상에서, 잠시나마 눈을 감고 음악에만 집중해 보길 추천한다.

회전하는 턴테이블 바이널과 바늘이 닿는 모습도 잠시 멍 때리며 바라보는 것도 흥미롭다.

빠른 변화와 복잡한 기술의 세상 속에서 최소한 음악이 내 귀로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매력도 있다.

음반을 찾아 나서는 여정도 주말 나들이 코스에 포함시켜 팔로워들과 공유해 보자.
결국 턴테이블과 LP도 결국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뿐.

아직 늦지 않았으니 이번 주말에는 어떤 곡으로 시작할지 고민해 보자.

참고로 바이널 디깅으로 찾은 성공한 나의 LP 보물 1호는 재즈 아티스트 ‘칼라 블레이(Carla Bley)’의 ‘섹스텟(Sextet)’이다. Lawns라는 곡을 꼭 들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