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하철참사 20주기] ① 그날 아침 무슨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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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비관 50대 "여럿이 같이 죽는 게 낫겠다 싶어 범행"
화재 상황 인식 못한 반대편 플랫폼 전동차 진입해 대참사 [※ 편집자 주 = 오는 18일은 대구지하철참사 발생 2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방화범의 범행이 안일한 대응과 겹쳐 대구지하철참사는 전 세계 지하철 관련 사고 가운데 최악의 참사로 기록됐습니다.
20년 전 참사 발생 사실을 국내 언론사 가운데 가장 먼저 보도한 연합뉴스는 참사 발생 20년을 맞아 당시 어떤 일이 발생했고, 이후 개선된 점과 해결되지 않은 과제 등을 담은 기획기사 3건을 송고합니다.
]
장애에다 여러 질환을 앓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온 방화범 김대한(당시 56)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혼자 죽는 것보다는 여럿이 같이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범행했다고 경찰에 붙잡힌 뒤 진술했다.
방화범 김대한은 범행 당일인 2003년 2월 18일 바로 경찰에 붙잡혔고, 현존전차방화치사죄로 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참사 이듬해인 2004년 교도소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 사상 최악 방화 참사의 시작
김대한은 범행 당일인 2003년 2월 18일 오전 8시를 전후해 집을 나와 근처 주유소에서 7천원을 주고 인화물질을 구입해 검은색 가방에 넣은 뒤 대구지하철 1호선 안심 방향 열차를 탔다.
오전 9시 52분을 전후해 열차가 중앙로역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는 가방에 들어있던 인화물질이 가득한 통을 꺼내 들었고, 1회용 라이터로 불붙이기를 시도했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주변에 있던 승객들이 말리다가 몸싸움이 시작됐고, 이 와중에 통에 들어있던 인화물질은 바닥에 뿌려졌고 불이 붙었다.
불이 나자 지하철 구내는 자동으로 전기공급이 끊어지면서 암흑천지로 변했다.
스프링클러가 없는 전동차 객차에 불이 삽시간에 번졌고 유독 가스가 가득 찼다.
당시만 해도 지하철 좌석 등은 불에 잘 타는 화학성 섬유 등으로 대부분 만들었다.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생사기로에 놓인 승객들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고, 노약자 등 일부 승객은 질식해 쓰러지기 시작했다.
192명이 숨지고 151명이 다쳐 전 세계 최악의 지하철 사고로 기록된 대구지하철 방화참사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 대재앙 불러온 무책임하고 안일한 대응
대구지하철 참사는 당시 대구지하철 사령실과 기관사 등의 무책임하고 안일한 대응이 화를 더 키웠다.
방화 초기 김대한이 불을 지른 안심 방향 객차 주변에서 화염을 본 일부 승객들이 대피하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멀리 떨어진 객차에서는 상황을 몰라 그대로 자리에 앉아 열차가 출발하기만 기다렸다.
불이 났으니 대피하라는 방송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심 방향 전동차가 불에 타고 있는 상황에서 반대편(대곡 방향) 플랫폼으로 열차가 진입했다.
중앙로역에서 전동차에 불이 난 상황인데 지하철 사령실에서는 '중앙로역을 주의해서 운전하라'고 통보만 하고, 운행중단 등을 지시하지는 않았다.
이 열차가 중앙로역에 정차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더라면 최소 100명 이상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으로 당시 수사당국은 추산했다.
중앙로역에 들어온 대곡 방향 전동차에 매캐한 연기가 차오르고 있는데도 객차 안에서는 "곧 출발하니 기다려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고 생존자들은 전했다.
이후 최초 불이 난 전동차와 이후에 중앙로역에 들어온 대곡 방향 전동차의 기관사들은 승객대피 조치 등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지하철 운전에 필요한 '마스콘키'를 뽑아 자신들만 대피해 버렸다.
이 때문에 객차 문이 열리지 않아 대피를 못해 숨진 이들도 많았다.
기관사와 대구지하철공사 종합사령실이 상황 파악만 제대로 했더라면 최악의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안일한 상황 파악으로 피해를 키웠던 대구지하철공사와 기관사들은 참사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피하거나 줄이기 위해 사고 당시 기관사와 종합사령실 운전사령 간의 교신 녹음테이프 녹취 내용을 조작하는 등 조직적으로 사건을 은폐하려 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 참사 후 전국 지하철 내장재 방염처리·안전 시스템 강화돼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가 있고 나서 대구를 포함해 전국 지하철의 객차 내장재는 모두 방염처리됐다.
전동차 출입문 열림장치, 통신장치, 객차 내·외부를 살펴볼 수 있는 폐쇄회로 장치 등도 대폭 강화됐다.
참사가 있었던 중앙로역 승강장 입구에는 수막 차단벽이 설치돼 화재 때 방사열을 줄이고 가스나 연기가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됐다.
정전에 대비해 4시간 이상 발광하는 야광 타일도 설치했다.
참사가 남긴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안전체험공간인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도 문을 열어 대구가 안전도시로 거듭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연합뉴스
화재 상황 인식 못한 반대편 플랫폼 전동차 진입해 대참사 [※ 편집자 주 = 오는 18일은 대구지하철참사 발생 2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방화범의 범행이 안일한 대응과 겹쳐 대구지하철참사는 전 세계 지하철 관련 사고 가운데 최악의 참사로 기록됐습니다.
20년 전 참사 발생 사실을 국내 언론사 가운데 가장 먼저 보도한 연합뉴스는 참사 발생 20년을 맞아 당시 어떤 일이 발생했고, 이후 개선된 점과 해결되지 않은 과제 등을 담은 기획기사 3건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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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에다 여러 질환을 앓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온 방화범 김대한(당시 56)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혼자 죽는 것보다는 여럿이 같이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범행했다고 경찰에 붙잡힌 뒤 진술했다.
방화범 김대한은 범행 당일인 2003년 2월 18일 바로 경찰에 붙잡혔고, 현존전차방화치사죄로 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참사 이듬해인 2004년 교도소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 사상 최악 방화 참사의 시작
김대한은 범행 당일인 2003년 2월 18일 오전 8시를 전후해 집을 나와 근처 주유소에서 7천원을 주고 인화물질을 구입해 검은색 가방에 넣은 뒤 대구지하철 1호선 안심 방향 열차를 탔다.
오전 9시 52분을 전후해 열차가 중앙로역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는 가방에 들어있던 인화물질이 가득한 통을 꺼내 들었고, 1회용 라이터로 불붙이기를 시도했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주변에 있던 승객들이 말리다가 몸싸움이 시작됐고, 이 와중에 통에 들어있던 인화물질은 바닥에 뿌려졌고 불이 붙었다.
불이 나자 지하철 구내는 자동으로 전기공급이 끊어지면서 암흑천지로 변했다.
스프링클러가 없는 전동차 객차에 불이 삽시간에 번졌고 유독 가스가 가득 찼다.
당시만 해도 지하철 좌석 등은 불에 잘 타는 화학성 섬유 등으로 대부분 만들었다.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생사기로에 놓인 승객들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고, 노약자 등 일부 승객은 질식해 쓰러지기 시작했다.
192명이 숨지고 151명이 다쳐 전 세계 최악의 지하철 사고로 기록된 대구지하철 방화참사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 대재앙 불러온 무책임하고 안일한 대응
대구지하철 참사는 당시 대구지하철 사령실과 기관사 등의 무책임하고 안일한 대응이 화를 더 키웠다.
방화 초기 김대한이 불을 지른 안심 방향 객차 주변에서 화염을 본 일부 승객들이 대피하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멀리 떨어진 객차에서는 상황을 몰라 그대로 자리에 앉아 열차가 출발하기만 기다렸다.
불이 났으니 대피하라는 방송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심 방향 전동차가 불에 타고 있는 상황에서 반대편(대곡 방향) 플랫폼으로 열차가 진입했다.
중앙로역에서 전동차에 불이 난 상황인데 지하철 사령실에서는 '중앙로역을 주의해서 운전하라'고 통보만 하고, 운행중단 등을 지시하지는 않았다.
이 열차가 중앙로역에 정차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더라면 최소 100명 이상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으로 당시 수사당국은 추산했다.
중앙로역에 들어온 대곡 방향 전동차에 매캐한 연기가 차오르고 있는데도 객차 안에서는 "곧 출발하니 기다려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고 생존자들은 전했다.
이후 최초 불이 난 전동차와 이후에 중앙로역에 들어온 대곡 방향 전동차의 기관사들은 승객대피 조치 등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지하철 운전에 필요한 '마스콘키'를 뽑아 자신들만 대피해 버렸다.
이 때문에 객차 문이 열리지 않아 대피를 못해 숨진 이들도 많았다.
기관사와 대구지하철공사 종합사령실이 상황 파악만 제대로 했더라면 최악의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안일한 상황 파악으로 피해를 키웠던 대구지하철공사와 기관사들은 참사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피하거나 줄이기 위해 사고 당시 기관사와 종합사령실 운전사령 간의 교신 녹음테이프 녹취 내용을 조작하는 등 조직적으로 사건을 은폐하려 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 참사 후 전국 지하철 내장재 방염처리·안전 시스템 강화돼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가 있고 나서 대구를 포함해 전국 지하철의 객차 내장재는 모두 방염처리됐다.
전동차 출입문 열림장치, 통신장치, 객차 내·외부를 살펴볼 수 있는 폐쇄회로 장치 등도 대폭 강화됐다.
참사가 있었던 중앙로역 승강장 입구에는 수막 차단벽이 설치돼 화재 때 방사열을 줄이고 가스나 연기가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됐다.
정전에 대비해 4시간 이상 발광하는 야광 타일도 설치했다.
참사가 남긴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안전체험공간인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도 문을 열어 대구가 안전도시로 거듭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