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종교적 이상 구현과 질서·권력 유지에 활용돼
英 법인류학자 "법 역사 파악하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법을 통해 본 4천년 인류 문명사…신간 '법, 문명의 지도'
1497년 탐험가 바스쿠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 캘리컷에 도달했을 때, 그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당시 세계의 변방이었던 포르투갈 출신으로서 중국과 이슬람, 인도 궁정에서 온 화려하고 세련된 물품 때문이었다.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슬람과 중국, 인도에서 온 각기 다른 색깔의 정교한 법률도 그의 시선을 끌었다.

유럽의 법은 여전히 로마 법학의 잔재가 남아있는 이질적인 지역 관습과 법원의 여러 판례에 불과했기에 발전된 형태의 법체계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퍼난다 피리 옥스퍼드대 법인류학과 교수가 쓴 '법, 문명의 지도'(원제: The Rule of Laws)는 세계 질서를 만든 4천 년 법의 역사를 담은 책이다.

저자는 600쪽 넘는 분량을 할애하며 고대 메소포타미아 법부터 현대 국제법까지, 거의 모든 법의 역사를 다룬다.

책은 2009년부터 2018년까지 진행한 '옥스퍼드 리걸리즘'(Oxford Legalism)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옥스퍼드 리걸리즘은 법학·인류학·역사학·동양학 등의 연구자들이 법체계에 대한 사례 연구를 다각도로 수행한 대단위 연구다.

법을 통해 본 4천년 인류 문명사…신간 '법, 문명의 지도'
저자에 따르면 법의 근간을 이루는 뿌리는 세 곳에서 파생했다.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이다.

메소포타미아 왕들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보통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규칙을 제시하면서 백성들에게 정의를 약속했다.

기원전 2112년쯤 군사지도자 우르남무는 군벌을 축출한 후 빈곤에 빠진 농민과 노동자들을 향해 사회적 불평등을 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빈부 차이가 극심해지고, 탐욕스러운 귀족들이 서민들의 재산을 채무 관계를 악용해 압류하던 시기였다.

우르남무는 살인·상해·거짓 구금·성범죄, 농업분쟁, 서약과 고발 등과 관련해 처벌과 배상을 규정하는 법을 제정해 기록했고, 이 법은 세월이 흐르며 살을 더해가 이슬람법과 유대인의 법, 나아가 로마법의 토대가 됐다.

메소포타미아법에 견줘 인도의 법은 좀 더 종교적 목적이 강했다.

정의에 대한 약속보다는 브라만교의 경전 베다에 게시된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제정됐다.

이에 따라 권리보다는 의무조항이 훨씬 더 많이 명시됐다.

법은 사람들이 카스트(계급)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면서 일상생활의 규칙을 제시했다.

제사장인 브라만이 법을 제정했고, 왕은 그 법을 실행만 할 수 있었지, 제정하진 못했다.

법을 통해 본 4천년 인류 문명사…신간 '법, 문명의 지도'
중국의 법은 정의 구현이나 의무의 부과보다는 규율의 질서에 가까웠다.

2천여 년에 걸쳐 중국의 법은 권력과 통제의 도구로 활용됐다.

황제는 사제계급이나 그 외 전문가들이 입법자로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법을 이용해 확장된 제국을 하나로 묶었고, 관리들을 변방까지 보내 다양한 백성을 대상으로 같은 법을 시행하게 했다.

질서에 대한 그들의 비전은 징계와 처벌 중 하나였다.

이들 세 문명의 법 전통은 전 세계에 스며들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웃 문명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 과정에서 법은 위대한 문명을 모방하거나 권위 있는 역사적 체제의 질서를 재현하려 했고, 우주론적 이상을 반영했으며 문명 세계의 비전을 창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법은 권력이었다.

브라만은 법을 이용해 왕의 권력에 제한을 두었고, 중국의 황제 등 전제 군주는 법을 신민 지배에 활용했다.

위정자들은 정당한 권력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저자는 법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알기 위해선 법의 역사를 파악하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르테. 이영호 옮김. 640쪽.
법을 통해 본 4천년 인류 문명사…신간 '법, 문명의 지도'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