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 투자사 △△ 심사역 있잖아. □□ 회장 아들이래.”

벤처캐피털 업계에 몸담은 사람들은 웬만하면 한 번씩 들어봤음 직한 말이다. 그만큼 요즘 벤처캐피털리스트 중에는 대기업이나 중견기업·금융사 오너가(家) 자녀가 즐비하다.

20여 년 전 벤처 붐이 불었을 당시에도 국내 대기업의 젊은 총수들은 벤처 투자와 제휴에 관심이 많았다. 2000년 9월 만들어진 ‘브이소사이어티’가 대표적 사례다. 최태원 SK 회장과 신동빈 롯데 회장, 이웅열 코오롱 회장, 정몽규 HDC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이 참여했다.
그래픽 = 김선우 기자
그래픽 = 김선우 기자
하지만 지금 대기업 오너 3, 4세와 중견기업 오너 2, 3세들은 그 수준을 넘어섰다. 아예 스타트업 투자 전문 계열사의 수장을 맡아 진두지휘하거나, 직접 심사역이 돼 현장을 돌며 우량 스타트업을 찾아 바닥을 훑고 있다.

○“신사업 발굴로 경영 능력 입증하겠다”

GS그룹은 스타트업 투자를 본격화하면서 오너 4세가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대표로 전면에 나섰다. 1985년생인 허태홍 GS퓨처스 대표로, 허태수 GS그룹 회장 바로 위 형인 허명수 전 GS건설 부회장의 둘째 아들이다. 스위스 에이글롱칼리지와 미국 조지타운대를 졸업한 이후 2012년 GS홈쇼핑 재무회계부 사원으로 입사해 벤처투자팀 매니저 등을 거치며 7년간 벤처 투자 실무 경력을 쌓았다. 그룹 안팎에서는 신사업 투자가 차세대 리더의 경영 능력을 입증할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룹 내 투자사에서 심사역으로 재직하며 ‘경영 수업’을 받는 경우도 있다. 홍석준 보광창업투자 회장 장남 홍정환 씨는 투자심사총괄을 맡고 있다.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의 장남 박준범 씨도 지난 4월 미래에셋벤처투자 심사역으로 입사했다. 그룹 핵심 계열사인 미래에셋증권이나 미래에셋자산운용에서 역할을 맡는 대신 스타트업 투자로 커리어를 시작한 것이다.

이동채 에코프로그룹 회장의 장녀인 이연수 씨는 에코프로의 CVC인 아이스퀘어벤처스에서 심사역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석준 우미건설 부회장의 아들 이승훈 씨는 투자사업팀 과장으로 프롭테크 분야 스타트업 투자 실무 경험을 쌓고 있다.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의 장남인 김동준 부사장은 2018년부터 키움인베스트먼트 대표를 맡으며 벤처기업 최전선에서 경험을 쌓았다. 지난해부터는 VC보다 더 크 규모의 자금을 굴리는 키움프라이빗에쿼티(PE) 대표를 겸직하며 보폭을 넓히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차녀 최민정 SK하이닉스 M&A프로젝트 리더는 온라인 쇼핑몰 판다코리아닷컴을 공동 창업하는 등 재계에서 스타트업 전문가로 손꼽힌다. 현재는 SK하이닉스를 휴직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기반을 둔 원격의료 스타트업 던(Done.)에서 비상근 자문역을 맡고 있다.

○스타트업 투자로 ‘디지털 전환’ 주도

전통 산업 기업일수록 오너 3, 4세가 스타트업 투자를 통해 그룹의 ‘디지털 전환’을 주도하고 있다. 문규영 아주그룹 회장의 장남인 문윤회 아주컨티뉴엄 대표는 미국 코넬대 호텔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그룹의 전통적 사업 기반인 건자재 사업이 아닌 호텔 사업을 이끌고 있다. 문 대표는 지난 2월 아주호텔앤리조트에서 사명을 바꾸고 기존 호텔·부동산 투자 사업부 외에 ‘벤처스튜디오’라는 신생 조직을 만들어 사실상 CVC로 운영하고 있다.

고(故) 이운형 세아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태성 세아홀딩스 사장은 2015년부터 투자 전문 자회사 아이언그레이의 대표직을 겸하며 부동산 대체투자 상품인 리츠(REITs)부터 콘텐츠, 패션 플랫폼까지 투자처를 확대하고 있다. 이 사장의 아내인 채형석 애경산업 총괄부회장의 장녀 채문선 씨는 최근 비건 화장품 스타트업 ‘탈리다 쿰’을 창업했다.

1988년생인 김대헌 호반그룹 기획부문 사장은 김상열 호반그룹 회장의 장남으로 일찌감치 경영승계를 마무리했다. 건축을 전공한 아버지와 달리, 김 사장은 경희대 골프산업학과를 졸업한 후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주택사업에 치우진 회사의 매출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계열 VC인 코너스톤투자파트너스와 액셀러레이터 플랜에이치벤처스를 아래에 두고 스마트건설과 스마트시티 등 신사업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허영인 SPC그룹 회장의 차남인 허희수 부사장은 지난해 11월 그룹의 신사업 전문 계열사 섹타나인에 합류하며 경영일선에 복귀한 뒤, 퀵커머스, 메타버스 분야 투자에 나섰다. 담철곤 오리온 회장의 장남 담서원 씨는 카카오의 인공지능 자회사인 카카오엔터프라이즈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신사업을 이끌고 있다.

아웃도어 제조업체 영원무역의 성기학 회장의 차녀 성래은 영원무역홀딩스 사장은 최근 싱가포르에 벤처캐피털 설립을 주도하는 등 경영 보폭을 넓히고 있다. 새로운 패션 브랜드를 발굴하는 것은 물론, 친환경 소재, 자동화 분야 스타트업에 투자할 예정이다.

○ 교육업계, 스타트업 투자가 '생존 전략'

학령인구 감소로 고전하고 있는 교육 분야 중견기업들도 오너 2, 3세가 스타트업 투자 전면에 나섰다. 교원은 장평순 회장의 장남인 장동하 기획조정실장(교원투어 대표)이 ‘교원 딥체인지 스타트업 데모데이’를 진두지휘할 정도로 스타트업 협업을 주도하고 있다. 그는 교원라이프가 2021년 인수한 KRT여행사인 교원투어의 대표직을 겸하며 여행사업을 새 먹거리로 공략하고 있다.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의 차남인 윤새봄 전 웅진씽크빅 대표는 스타트업 놀이의발견을 운영하고 있다. 웅진씽크빅 벤처사업부에서 시작한 놀이의발견은 2020년 분사한 후 회원 수 100만 명을 돌파했다.

대교는 강영중 회장의 장남 강호준 대교 대표가 인공지능(AI) 수학교육 플랫폼 ‘노리’와 학원 전문 서비스 기업 에듀베이션 인수를 주도했다. 차남인 강호철 대교홀딩스 대표는 계열 벤처캐피털(VC)인 대교인베스트먼트의 대표를 겸직하기도 했다.

‘아기상어’를 대유행시킨 콘텐츠 플랫폼 더핑크퐁컴퍼니는 모회사의 본업을 뛰어넘은 경우다. 김진용 삼성출판사 대표의 장남 김민석 대표가 이끄는 더핑크퐁컴퍼니는 기업공개(IPO)를 앞두고 투자자들 사이에서 1조원의 기업가치를 평가받았다.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삼성출판사의 시가총액은 2770억원 수준이다.

○외부에서 투자 전문가로 활약하기도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의 장남인 정경선 실반그룹 대표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투자 전문가로 활약하는 사례다. 실반그룹은 정 대표가 2020년 설립한 싱가포르 기반 사모펀드(PEF) 운용사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테마로 싱가포르 제약사 주니퍼바이오로직스 등에 투자했다. 2014년엔 임팩트 투자사인 HG이니셔티브를 설립했다.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의 차남인 박재원 전 두산중공업 상무는 컨설팅회사 벨스트리트파트너스를 이끌며 벤처 투자에도 나섰다. 미국 뉴욕대 졸업 후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박 전 상무는 실리콘밸리 기반 VC인 D20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또 고 구자홍 LS니꼬동제련 회장의 장남 구본웅 씨는 마음캐피털그룹 대표를 맡고 있다. 영화배급사 쇼박스에 투자한 바 있다.

구연제 마젤란기술투자 투자심사역은 구본준 LX그룹 회장의 장녀다. LX그룹이 CVC 설립을 준비 중인 만큼 구 심사역이 경영에 참여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의 장녀 박하민 씨는 미국계 VC인 GFT벤처스 파트너로 활약 중이다. 그 밖에 도재원 컴퍼니케이파트너스 투자심사역은 국내 1세대 VC인 스틱인베스트먼트의 도용환 회장의 아들이다.

○‘재무·기획파트에서 경영수업’ 옛말

그룹 총수 일가 3, 4세들의 행보는 주로 재무·기획 파트에서 총수의 꼼꼼한 지도를 받으면 경영수업을 시작했던 2세들과 결이 확연히 다르다. VC업계에서는 이들이 대부분 해외 대도시나 정보기술(IT) 거점 지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2010년대 전후에 모바일 혁명과 최근 웹 3.0의 혁신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는 점을 그 배경으로 꼽고 있다. 한 VC업계 대표는 “기업 오너가 자녀들이 젊은 창업가나 빅테크 대표들, 투자 전문가들과 자주 소통한다는 점도 이들이 스타트업 투자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해외 유학 등을 통해 쌓은 개인 네트워크 덕에 스타트업 분야 유망 기업 발굴이나 투자 기회 확보 등 이른바 ‘딜 소싱’에도 강한 편이다.

또 다른 VC 관계자는 “기업을 한 차례 더 도약시키기 위해서는 과거와 달리 외부에서 신성장 엔진을 찾아야 한다는 판단도 한몫했을 것”이라며 “VC 투자는 대표적 고위험 투자인 만큼 경영 능력을 빨리 보여줘야 한다는 조급함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란/김종우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