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보티첼리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9단계 등급의 지옥을 역삼각 원추형으로 그려낸 ‘지옥지도’.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보티첼리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9단계 등급의 지옥을 역삼각 원추형으로 그려낸 ‘지옥지도’.
“사람들이 칭송은 늘어놓으면서 읽지 않는 책.”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일찍이 고전을 이렇게 정의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은 다르다. 1320년 완성된 이 책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끊임없이 다시 읽히고 새롭게 조명된다. 단테 서거 700주년이었던 지난해 세계적으로 ‘신곡’ 붐이 일기도 했다.

이 책은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은 주인공 단테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아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하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전한다. 지옥·연옥·천국 각 33편 총 100편으로 이뤄진 1만4233행짜리 대서사시다. 산 채로 죽음을 건넌 단테처럼 <신곡>은 불멸의 고전으로 살아남았다.

“죽음을 통해 生을 말한다”

6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신곡> 관련 서적 판매량은 지난달 30일부터 5일간 전년 동기 대비 2.7배 늘었다. 직전 5일과 비교하면 70%가량 증가했다. 서점가에서는 ‘임윤찬 효과’로 본다.

밴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인 그는 지난달 30일 기자 간담회에서 “2년 전 독주회에서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를 연주했는데 이 곡을 이해하려면 <신곡>을 읽어야 한다”며 “여러 번역본을 다 읽어 전체 내용을 외우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지난 1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목프로덕션 제공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지난 1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목프로덕션 제공
<신곡>은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뿐 아니라 보카치오의 소설집 <데카메론>, 로댕의 조각 ‘지옥의 문’, 푸치니의 오페라 ‘일 트리티코’, 댄 브라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인페르노’ 등 다양한 예술 작품에 영향을 미쳐 왔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예술사에서 불멸의 주제인 ‘죽음’을 다룬 작품이라는 점을 꼽는다. 사후세계는 인간이 끝내 정복하지 못한 땅이다. 유한한 인간은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비로소 죽음 너머를 엿본다.

단테와 더불어 지옥, 연옥, 천국을 차례로 통과한 독자는 삶과 죽음, 선과 악, 죄와 벌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한때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사람이 아닌” 존재들은 ‘사람다움’을 묻는다.

<신곡>을 번역한 김운찬 대구가톨릭대 프란치스코칼리지 교수는 “이 작품은 ‘저승 여행기’로 죽은 존재들과 인간 세계에 대해 논한다”며 “죽음을 통해 사후 세계가 아니라 거꾸로 인간과 현실, 삶을 노래한다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인생의 길 잃은 이에게 신곡

<신곡>은 서양문학의 걸작으로 추앙받는다. <파우스트>를 쓴 괴테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최고의 것”이라고 말했다. 풍부한 묘사, 상징과 함께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던 과도기 유럽의 사상과 관념, 의식 세계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플라톤, 소크라테스 등 쟁쟁한 철학자들은 오로지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갇혀 있다. 동시에 7개의 지옥을 지키는 수문장은 성경 속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 신화의 괴물들이다.

단테가 채택한 언어는 신의 세계, 중세의 질서에 대한 작별 인사다. 그는 당시 지식인의 언어였던 라틴어 대신 고향인 피렌체 방언으로 책을 썼다. 마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게 종교개혁의 단초가 됐듯 <신곡>은 이탈리아 문학의 문을 연 작품으로 평가된다. 현대 이탈리아어의 정립에도 공헌했다. 단테가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신곡’의 원제는 ‘La Comedia di Dante Alighieri’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희극’이란 뜻이다. 단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고귀한 주제’를 ‘고상한 문체’로 다룬 비극을 높이 산 것을 의식해 민중어로 쓴 자신의 작품에 희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옥에서 시작해 천국으로 끝나는 ‘해피엔딩’이란 의미도 담았다.

훗날 고귀하고 장엄한 내용에 걸맞은 제목을 고민하던 보카치오가 ‘거룩한(divina)’을 제목에 붙이면서 ‘신곡’이란 이름이 됐다. 국내에는 1950년대 고(故) 최민순 신부의 번역으로 처음 소개됐다.

단테는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가 저승 여행을 시작한 작품 속 주인공처럼 생의 풍파 가운데 역작을 남겼다. 김 교수는 “단테는 정적들에 의해 숙청당한 뒤 유랑생활을 하던 중 인생의 의미를 되짚으며 이 작품을 썼다”며 “지금 인생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고 했다. 단테가 첫사랑 베아트리체에게 바친 시들을 엮은 <새로운 인생>(민음사·222쪽·8500원), 단테의 철학을 담은 이론서 <향연>(나남출판·429쪽·2만5000원)도 <신곡>과 함께 읽을 만하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