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근현대 어업 문화 엿볼 수 있는 독특한 민간 등대
원형 남은 건 도내 6기뿐…"기록화 작업 통해 관리·보전"

지난 2011년 7월 23일 제주 서귀포시 보목동 보목포구.
[다시! 제주문화](16) 제주 섬 밝힌 '등명대' 100년 만에 문화재로
제주 고유의 옛 등대인 '등명대'(燈明臺, 일명 도대불) 위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커다란 불꽃 모양의 조형물이 설치돼 있었다.

등명대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유적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듯한 조잡한 조형물이었다.

당시 기자와 함께 이곳을 찾았던 한 향토사학자는 할 말을 잃은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는 "제주에 남아있는 등명대 중 원형을 간직한 몇 안 되는 유적이지만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아 이 사달이 난 것"이라며 "엄연한 훼손"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배들이 입출항하는 포구 입구에 세워진 등명대는 깜깜한 밤에 배를 타던 어부들의 길잡이가 됐던 제주만의 민간 등대다.

보목포구 등명대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920∼1930년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근대 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한 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식민지 잔재로 가치가 없다'는 이유였다.

이 등명대는 오랜 세월이 지난 끝에 지금에서야 뒤늦게 문화재로 인정받았다.

지난달 28일 '제주도 문화재 보호 조례'에 따라 보목포구 등명대를 비롯한 도내 남아있는 등명대 6기가 처음으로 제주도 지정 문화재로 등록된 것이다.

그사이 조잡한 플라스틱 조형물은 사라졌다.

2∼3년 전 보목리 마을주민들이 마을 숙원사업으로, 등명대 상단 부분을 새로 복원했다.

[다시! 제주문화](16) 제주 섬 밝힌 '등명대' 100년 만에 문화재로
◇ 학계·주민·언론 노력의 결실
제주에는 총 20개 안팎의 등명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전문가마다 16기, 17기, 19기, 21기 등 추정치가 조금씩 다르다.

근현대 들어 제주4·3과 같은 굵직한 사건이 발생했고, 급격한 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등명대는 보호받지 못한 채 속절없이 사라져갔다.

제주도는 전수조사를 통해 2000년대 초반까지 16기의 등명대가 제주에 남아 있었는데 당시 4기가 사라졌고 6기는 복원과정에서 원형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원형을 잘 간직한 것으로 평가받는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구좌읍 김녕리·조천읍 북촌리·우도면 영일동 4기와 서귀포시 대포동·보목동 2기 등 총 6기만을 최근 문화재로 등록했다.

도는 등명대가 제주에만 있는 고유 유산으로 희소하고, 동시에 제주 현무암을 응용해 독특한 형태로 축조돼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또 근현대 어업문화와 해양 생활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해양 문화자원으로, 역사성 및 학술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다시! 제주문화](16) 제주 섬 밝힌 '등명대' 100년 만에 문화재로
오랜 세월 학자들과 마을주민, 언론이 끊임없이 등명대의 가치를 알리고 문화재 등록 필요성을 제기한 끝에 이뤄진 것이다.

등명대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우선 등명대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등(燈)을 밝히는(明) 대(臺)', 즉 등대다.

100여 년 전 세워진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등명대(1915년 12월 제작)의 경우 건립비에 '燈明臺'라고 명칭과 제작연도가 새겨져 있다.

화북 포구에도 같은 글귀가 쓰인 비석이 있어 등명대라는 이름이 알려졌다.

한편, 등명대를 '도대불'이라고 부르는 마을 사람들도 많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보면 사람들이 돛대처럼 높은 대(臺)를 세워 불을 밝혔기 때문에 '돛대불'이라 했고, 이것이 '도대불'로 바뀌었다는 주장이 있다.

또 일제시대 당시 만들어졌던 민간등대인 만큼 등대(燈臺)의 일본어 '도두다이'(とうだい)에서 유래됐다는 주장도 있다.

제주도는 문화재위원회심의 당시 '등명대', '도대불', '민간 등대', '옛 등대' 등 다양한 명칭을 놓고 고민한 끝에 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등명대'로 표기하기로 했다.

[다시! 제주문화](16) 제주 섬 밝힌 '등명대' 100년 만에 문화재로
◇ 고단한 어부들 삶 지킨 '생명의 빛'
20세기 초 제주에는 등명대만 있었고, 현대식 등대는 없었던 것일까?
제주도 부속 섬인 우도와 마라도에 1906년, 1915년에 각각 현대식 등대가 들어섰다.

제주도 본섬에는 한일합병 6년째 되는 1916년 산지등대가 만들어졌다.

산지등대가 있는 제주시 사라봉은 일제강점기 당시 산지항(현 제주항)과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일대를 감시하는 중요 군사기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현대식 등대는 침탈 물자 등을 부산과 일본 등지로 나르기 위해 건립된 제국주의의 부산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제주 어민들의 조업 안전을 위한 용도는 아니었던 셈이다.

등명대는 암초가 많아 위험이 늘 도사리던 제주 바다에서 근해를 중심으로 어업활동을 했던 제주 어촌 주민들이 생계를 위해 자발적으로 직접 만들어 관리했던 민간 등대다.

당시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솔칵'(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 가지의 방언)으로 불을 지피거나 생선기름·석유를 이용했다.

석유는 구하기가 어려워 대부분 상어의 간에서 짠 기름, 고등어 등 각종 생선의 내장을 썩힌 다음 끓여서 만든 생선기름을 주로 사용했다.

[다시! 제주문화](16) 제주 섬 밝힌 '등명대' 100년 만에 문화재로
등명대는 마을 자체에서 공동 관리를 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고기잡이 나간 집에서 돌아가면서 관리했다.

어부들이 해 질 무렵 뱃일 나가면서 불을 켠 뒤 밤새 일을 하고 아침에 돌아올 때 불을 끄는 방식이었다.

일각에서는 등명대 역시 일제의 어업 수탈과 어촌 통제를 위해 만들어진 일제 잔재라는 견해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제주 어부들의 고단한 삶에 불을 밝히고 길잡이가 됐던 등명대의 의미, 옛 제주 어민들의 생활사를 엿볼 수 있는 독특하고 귀중한 문화재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한다.

이제 당당히 문화재로 지정된 만큼 체계적인 관리와 보전이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해안도로 개설과 방파제 공사 등으로 상당수가 소실됐고, 복원된 등명대의 경우 기계로 네모반듯하게 자른 돌을 쌓아 올려 대부분 자연미를 잃어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원형이 남은 것은 단 6기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김나영 학예연구사는 "우선 안내판을 설치해 등명대가 문화재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는 점을 도민과 관광객들에게 알리고, 이어 실측 조사와 옛 사진·증언 등을 토대로 한 기록화 작업, 모니터링을 통해 문화재를 꾸준히 보호 관리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원형 그대로 남은 등명대 6기를 문화재로 등록했지만, 혹시나 제주에 남아있는 또 다른 등명대를 제보해준다면 추후 검증을 통해 추가 문화재 등록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제주문화](16) 제주 섬 밝힌 '등명대' 100년 만에 문화재로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