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중국과의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승기를 먼저 잡은 모양새다. 전세계 반도체 관련기업들의 중국 내 투자를 막고, 중국 반도체 기업의 돈줄을 차단하면서다.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리겠다는 ‘중국 제조 2025’ 목표를 2025년이 되어도 달성하기 힘들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던 국내 기업들도 전략 재정비에 나섰다.

16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대만 반도체 기업 TSMC는 최근 중국 내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공장 증설에 제동이 걸렸다. 대만 매체 디지타임즈는 최근 증설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우려한 미국 때문인 것으로 보도했다. 중국의 대표 반도체 기업 칭화유니가 최근 파산 절차에 들어간 것도 중국기업에 대한 자금줄을 막은 미국의 영향이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

미국, 전방위 중국 압박

TSMC는 난징에 12인치(300㎜) 웨이퍼 공장을 이미 두고 있다. 여기에 중국 현지 등 자동차 기업들에게 납품할 차량용 반도체를 위한 28나노(㎚·1㎚=10억분의 1m) 제조 생산라인을 추가로 구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TSMC의 파운드리 증설이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반도체기업 칭화유니그룹이 최근 파산·법정관리 절차를 밟게 된 배경도 미국 정부의 압박이라는 의견도 있다. 칭화유니는 지난해 11월 13억위안(약 2200억원) 규모 회사채를 갚지 못하면서 첫 디폴트를 냈다. 전체 자산 3000억위안(약 53조원)을 갖고 있는 칭화유니의 채무는 지난해 6월 기준 2029억위안(약 35조2274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표면적으로는 중국 정부가 반도체 기업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을 멈추고 옥석가리기에 들어갔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이면엔 미국이 자금줄을 차단한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이다. 지난 3월 파이낸셜타임즈는(FT)는 홍콩 지역 칭화유니 채권단이 칭화유니 해외 자산 동결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칭화유니가 역외 자산을 처분해 중국 본토로 옮기지 못하게 하는 조치다. 칭화유니가 해외 자산을 팔아 빚을 갚을 길이 막히게 된 셈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미국 하원을 통과한 ‘외국기업 책임법’은 회계나 기업지배구조가 불투명한 해외 기업에 대한 투자를 제한하고 있다"며 "이 법 때문에 전세계 투자자들은 글로벌 중국 기업에 대한 투자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국의 中 압박의지, 예상보다 더 강해"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긴장하고 있다. 미국의 중국 반도체 굴기에 대한 압박이 예상보다 빨리 현실로 다가와서다. 미국 내 투자를 늘리는 데서 나아가 중국 기업의 생사까지 좌우할 수 있을 만큼 미국 정부의 의지가 강력하다는 데 이견이 없다.

특히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에서 각각 메모리반도체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내 반도체 생산은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을 끌어올리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 업체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은 지속적으로 공정을 개선할 수밖에 없는데 최첨단 장비를 중국 바깥에서 들여와야 가능하다"며 "현재 미국 정부의 기조가 유지되는 한 중국 내 생산라인의 시스템을 바꾸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0년 5월 18일 중국 시안의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생산공장을 현장점검하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0년 5월 18일 중국 시안의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생산공장을 현장점검하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실제 미국은 중국에 최첨단 반도체 장비 반입을 총력을 다해 막고 있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이 중국에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팔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예다. EUV는 웨이퍼에 전자회로를 새길 때 사용하는데 미세공정에 반드시 필요하다.

SK하이닉스는 이같은 미국과 중국 간 긴장관계가 인텔 낸드사업 인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보고 상황을 예의주시 중이다. SK하이닉스는 인텔 낸드플래시 메모리 사업부 인수를 진행 중이다. 각국의 기업결합 승인을 받고 있는데 최근 영국 정부의 승인 발표가 나면서 중국과 싱가포르 심사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중국이 미국을 의식해 SK하이닉스의 낸드 사업 인수에 제동을 걸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중국 기업들이 한국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업에 대한 인수합병(M&A) 매물을 찾고 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중국으로선 장비를 반입할 수 없는 만큼 반도체 관련 기술을 가져가기 위해 반도체 소부장 기업을 물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