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결혼식도 뷔페 식사이용권을 받았습니다. 뷔페 장소는 꽤 넓고 큰 규모였습니다. 요리 종류도 장소의 크기에 맞게 다 먹어보지 못할 정도로 다양했습니다. 모양과 색깔도 상당히 먹음직스러웠고 어떤 음식을 먼저 선택할지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먹는 순간, 그 마음은 사라졌습니다.
필자는 미식가나 음식 전문가가 아닙니다. 매일 <집 밥>하는 아줌마입니다. 언제부턴가 ‘남이 해 주는 음식은 다 맛있다’며 사먹거나 바깥 음식이 좋아서 외식예찬가가 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이 뷔페 음식은 절반은 못 먹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양 보다 질’이란 말은 불변의 진리 같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 시간 하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말보다 <글>이 소통의 중심이 되는 경우가 더 많으니 글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일일이 만나지 못해 매일 SNS 상으로 인사와 근황을 나누는 경우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수다’는 직접 만나서 주고받아야 묘미. 필자도 아들친구 엄마들을 만나면 하루 일정은 포기해야 할 정도로 막힌 물꼬가 터지듯이 말을 쏟아 냅니다.
이쯤에서 필자 가족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필자는 결혼을 안 하고 평생 홀로 사신 84세 ‘큰아버지’가 계십니다. 큰아버지는 열 살 때 열병을 앓아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보건소 검진을 위해 몇 번 집 밖을 나가본 것 외에는 나가신 적이 없습니다. 필자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친정어머니가 지금껏 모시고 사시는데, 큰아버지가 우리 4남매에게는 정신적으로 큰 의지가 되어왔습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임종을 기다리는 중에 있습니다. <사진: 큰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남해군 남해대교>
“고맙다! 건강해라! 잘 살아라!”
이 세 마디는 큰아버지로부터 필자가 늘 들어온 최고의 말입니다.
“큰아버지! 저 이제 서울 올라갑니다! 엄마 말 잘 듣고요.
큰아버지 좋아하는 막걸리 값, 여기 손에 드릴게요. 하하하!”
“그래, 고맙다. 건강해라! 잘살아라!”
“네! 큰아버지도요. 또 금방 올게요.”
이제 그 말씀 세 마디도 조카들한테 못 해 주시는 상황이 되고 보니, 그 말씀 세 마디가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많은 음식을 대접한다고 해서 그 입맛을 다 충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듯이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다 채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결국, 이쯤에서 필자는 평소 우리가 하는 말에서 양 보다 질을 말하고 싶습니다. 말도 질적인 면을 추구하며 살다보면 더 나아가서는 <질>이 <격>으로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의 정성 담긴 음식과 몇 마디의 사랑이 느껴지는 말이 그 사람의 ‘품격’이고 ‘인격’으로 아주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지수2017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