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홍엽, 설악산에 취하다.<上>
별의별 산이름도 다 있다. 귀때기청봉(1,578m)도 그러하다. 귀때기청봉은 대청봉에서 서쪽 끝 안산으로 이어지는 서북주능선에 있는 봉우리다. 얽힌 說은 이러하다.
옛날 옛적, 설악산 봉우리들이 높이 경쟁을 했다. 높이 순으로 대청, 중청, 소청, 끝청이 결정 되었는데 나중에 한 봉우리가 나타나 자기가 제일 높다고 박박 우기다가 귀때기를 맞고 지금의 장소로 쫓겨왔다. 그래서 ‘귀때기청봉’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다. 황당무계하나 이러한 설이 있어 즐겁지 아니한가. 귀때기청봉 갈림길을 벗어나 끝청으로 향하는 서북능선은 이미 초겨울을 준비하는 듯 하다. 나뭇가지는 서둘러 잎을 털어내고 뒹구는 낙엽은 발밑에서 서걱거린다. 사시사철 변화는 이처럼 어김없고 또한 쉼없다. 해발 1,610m 끝청에 이르니 거친 설악 비경이 발아래로 짜릿하다. 바짝 다가선 중청과 대청봉, 용의 등뼈라는 공룡능선, 용의 어금니를 닮은 용아장성, 불교 최고의 성지라는 봉정암이 운해에 갇혔다가 드러나길 거듭한다. 시선 머무는 곳이 곧 선경이다. 끝청에서 1박이 예약된 중청대피소까지는 1km 남짓, 길은 완만한 편이나 예까지 오느라 다리심이 빠져 걸음 모양새가 너덜너덜하다. 중청봉은 군사시설이 있어서 일반 산객들은 출입 할 수 없다. 중청 산자락에서 건너다 본 대청봉 모습은 거대 피라밋을 연상케 한다. 정상을 향해 점점이 박혀 이동하는 산꾼들 모습이 역전의 용사들 같다. 시작점 한계령에서는 하늘이 높고 파랬었다. 끝청을 지나면서부터 은발을 풀어 헤친 듯 운무가 산자락을 휘감기 시작하더니 중청에 이르자 하늘은 온통 잿빛으로 바뀌어 낮게 내려앉았다. 중청대피소에서 기상을 확인했다. 내일 오전부터 비가 시작될 거란다. 동행한 산우 J는 내일 걸어야 할 빗길 공룡능선을 걱정했다. J는 여러번 공룡능선을 목표로 올랐다가 기상이 나빠서, 컨디션이 나빠서… 여태 공룡을 접수하지 못했다며 이번만큼은 비가 쏟아지더라도 진행할 것이라 했다.
대피소 방 배정이 5시부터라 배낭을 내려두고 맨 몸으로 대청봉으로 향했다. 바람막이용 재킷을 챙겨 입었는데도 한기가 느껴졌다. 대청봉 인증샷을 위한 줄서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이번에도 줄서기는 포기다. 언저리에서 셀카봉 빼들고 있다가 정상석 앞이 비는 순간, 잽싸게 셔터를 눌러 2% 부족한 인증 컷을 건졌다. 대청봉에서 바라보는 설악운해가 혼자 보기 아쉬워 가족에게 영상 통화를 시도해 보았으나 신통찮다. 대신 운무의 움직임을 짧은 영상에 담는 것으로 대신했다. 중청봉과 대청봉 사이 안부에 옴팍하게 자리한 중청대피소가 오늘따라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선다. 중청대피소는 설악산을 오른 산꾼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렀을 것이다. 이처럼 산꾼들의 애환을 간직한 중청대피소가 건립 24년 만에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측은 설악산 주능선인 대청봉과 중청봉 훼손이 가속화된다는 지적에 따라 중청대피소를 2019년까지 폐쇄하고, 능선 하부에 자리한 희운각대피소를 증축 리모델링해서 이용객을 흡수할 계획이라고 했다. 지하 1층에 있는 목조 2층 침상 중 아래층을 배정 받았다. 여성들은 윗층에 배정됐지만 어찌됐건 남여가 한 공간이라 이래저래 불편할 수밖에. 햇반에 양념 불고기 그리고 소주 한 잔으로 석식을 끝낸 뒤 내일 새벽 02시 30분에 알람을 맞춰 놓고서 소등시간인 9시 전에 일찌감치 침상에 몸뚱어리를 눕혔다. < 下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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