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쇼조 평전 '참된 문명은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
평화·환경·생명의 사상가…"동학은 문명적" 평가도

그릇된 군국주의의 신화에 사로잡혀 자국민을 포함해 수많은 동아시아의 죄없는 민중을 참화에 몰아넣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의 일부 정치인, 언론, 극우집단을 보노라면 '구제불능'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미 100년전 일본에도 침략 근성과 물질문명 맹신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평화와 환경, 생명 존중을 외친 선각자가 있었다.

최근 출간된 '참된 문명은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상추쌈)는 일본 정치인이자 사상가, 민중운동가 다나카 쇼조(田中正造·1841~1913)의 삶과 사상을 다룬 책이다.

평생을 다나카 쇼조 연구에 매진하면서 한센인 인권 운동, 핵발전 반대와 지문 날인 반대 운동 등을 통해 "학문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라는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애써온 일본의 역사학자 고마쓰 히로시(小松裕)가 썼다.

책 제목은 그가 남긴 말 가운데 가장 많이 인용되는 "참된 문명은 산을 황폐하게 하지 않고, 강을 더럽히지 않고, 마을을 부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아니한다"에서 따왔다.

제국주의 시대 일본에도 의인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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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북쪽, 오늘날의 도치기현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다나카는 에도 막부 말기라는 사회적 변동기를 살면서 '황국 우월론'을 주장한 히라타 국학(平田國學)이나 '천황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에도 관심을 지녔지만 청년 시절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마을의 자치 정신'이었다.

이미 20대에 영주의 부당한 조치에 맞서다 최초의 옥살이를 경험한다.

그 후 관리로 안정적인 삶을 지내는가 싶더니 30세 무렵에는 형사사건에 연루돼 누명을 쓰고 또 3년간 영어의 몸이 된다.

혐의를 벗고 풀려난 뒤 메이지 유신 주축 세력 간 내전인 '세이난(西南)전쟁'을 지켜보면서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구의회, 현의회 의원을 거쳐 49세 때 제1회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의원 자리에 오른 후 1901년 스스로 사퇴할 때까지 6차례 연속 당선했다.

그가 의원으로 재직하는 동안 가장 주의를 기울인 문제는 지역구 인근 아시오 구리광산이 초래한 환경파괴였다.

광독(鑛毒)으로 인한 주민들의 질병과 유아 사망은 점점 더 심각해졌고 광산지역을 흐르는 강물의 범람으로 농지에까지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했다.

주민들은 도쿄까지 나가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청원 운동을 벌였으나 광산업자와 결탁한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또다시 도쿄 청원에 나선 주민들을 경찰이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검거하는 탄압사태가 발생하자 다나카는 의회 질의 등 통상적인 방법으로 사태 해결의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중대 결심'을 하게 된다.

바로 천황 면전에서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는 '직소'를 감행하기로 한 것이다.

천황을 '신'으로 여기던 당시 일본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이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최대한 가족이나 지역 구민 등 주변 사람들에게 불똥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 의원직도 사퇴하고 유서까지 미리 쓴 다나카는 의회 개원식에 참석했다 돌아가는 천황의 마차에 뛰어들어 "부탁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치며 상소문을 전달하려고 했다.

경비 경찰에게 붙잡혀 상소문 전달에는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신문 호외로 보도될 정도로 일본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다나카는 이 일이 아니라 다른 사건 관련 재판에서 하품을 했다는 이유로 결국 또 징역살이를 하게 된다.

이후 그는 모든 직책을 다 내려놓고 청빈한 삶을 살며 환경운동과 평화운동, 마을 자치운동,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바탕이 될 새로운 사상을 정립하기 위한 운동에 몸을 바친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감옥살이를 하면서 성경을 깊이 공부한 데다 만민 평등과 세계 평등을 추구한 진보적 불교 정파인 오모토교(大本敎) 인사들과도 교류한 다나카는 정식으로 현대적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못지않게 넓고 깊은 사상의 경지에 이르렀다.

말년에는 광독 피해지역이자 수몰 예정지인 야나카 마을에서 이상적인 공동체 구현을 위한 방안 연구에 몰두해 '야나카학'이라는 사상 체계를 가다듬었다.

그가 꿈꾼 것은 부국강병, 대국 일본이 아니라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연의 은혜로움 아래에서 사람다움을 지켜가는 삶이었다.

다나카는 청나라, 러시아와 잇따라 치른 전쟁에서 승리하며 고양된 일본의 침략주의와 군국주의를 경계했다.

청일 전쟁 이후 중의원으로서 제출한 질문서는 "백성을 죽이는 것은 나라를 죽이는 것이다.

법을 소홀히 하는 것은 나라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모두 스스로 나라를 망치는 것이다.

재물을 함부로 다루고 백성을 죽이며 법을 어지럽혀서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이것을 어떻게 보겠는가"라고 '질문'했다.

비록 정부로부터는 "질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없다"는 말 이외에는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지만.
러일전쟁 후에는 '무전론(無戰論)'을 펴며 군비에 들일 돈으로 외교비를 30배, 300배로 늘려 일본이 세계 평화를 여는 중심이 될 것을 주장했다.

다나카는 청일전쟁 빌미가 된 동학에 대해서도 일본의 여느 지식인들과는 다른 평가를 했다.

그는 "동학당은 문명적이다.

12개조 군율인 덕의를 지킴이 엄격하다.

인민의 재물을 빼앗지 않고 부녀자를 욕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다나카는 동학에서 조선이 지향해야 할 '개혁의 새싹'을 보았으나 일본군이 이를 짓밟아버렸다고 개탄했다.

남은 재산을 모두 기부하고 탁발승처럼 야나카 마을을 전전하며 집과 땅을 빼앗긴 주민들을 위해 헌신하던 다나카는 72세 노구를 이끌고 운동 자금을 부탁하기 위해 친구의 집에 들렀다가 쓰러진 뒤 한달여 만에 숨졌다.

그가 마지막까지 메고 다니던 바랑에는 신약성서, 일본제국헌법과 마태복음을 한데 묶은 책, 일기장 세 권, 강물 범람 피해 조사 보고서 초고, 휴지 몇 장과 김, 돌멩이 세 개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그의 전 재산이었다.

저자는 "다나카 쇼조는 서양 근대 문명을 본보기 삼아 대국으로 치닫는 근대 일본을 날카롭게 비판했으며 억압당하는 이들의 처지에 서서, 혹은 아무 가치 없는 생명으로 치부된 사람들의 눈으로 서양 근대를 뛰어넘는 사상과 원리를 찾고 세워나갔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런 점에서 그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한국의 함석헌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민중해방 사상의 본줄기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썼다.

번역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리츠메이칸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한 뒤 교직 생활을 하다 한국으로 건너와 원광대학교 대학원에서 '다나카 쇼조와 최제우의 비교 연구-공공철학 관점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오니시 히데나오(大西秀尙)가 했다.

상추쌈. 244쪽. 1만6천원.
제국주의 시대 일본에도 의인은 있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