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경제활동의 자유를 許하라
대런 애스모글루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 등이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동일한 언어, 문화, 인종을 가진 남북한이 왜 선진국과 최빈국으로 갈렸는지 묻는다. 한국은 사유재산, 공평한 법, 교환과 계약의 자유가 보장되는 포용적 경제제도를, 북한은 그 반대인 착취적인 제도를 가졌기 때문이란 답을 제시한다.

자유시장경제는 포용적인 경제다. 자유로운 경제활동으로 얻은 성과물을 가져갈 수 있는 개인은 노력할 인센티브가 있으며, 자신의 능력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활동을 한다. 창업과 혁신이 일어나며 생산은 극대화되고 생활수준도 높아진다. 시장에서의 자발적인 교환은 거래당사자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다. 이게 진정한 ‘포용 경제’다.

반대로 마르크스 등의 좌파 이념가들에게 거래는 부등가교환이다. 특히 노동에 대해 임금을 주는 거래는 자본가에 의한 착취 과정이다. 소득불평등은 기업이 근로자를,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착취하는 구조에서 나왔으며, 마땅히 타파돼야 한다. 스티브 잡스처럼 많은 사람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든 사람이 많은 자원을 갖게 되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가치사슬로 연결돼 있다는 점은 무시된다.

이런 좌파적인 사고는 현 정부 정책에도 스며든 듯하다. 국정 비전으로 내건 공정경제, 소득주도성장 등을 관통하는 것은 소득격차 해소다. 분배와 성장의 선순환이란 포용적 성장도 내세우나 그 수단은 경제적 자유의 제한, 재산권 제약 등으로 포용적 제도의 기초를 흔드는 것들이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핵심인 최저임금 인상을 보자. 가령 시장임금이 시간당 7000원이라면 이는 누군가를 고용해서 7000원 이상의 가치를 만드는 기업과 그 임금을 받고 일하는 것이 이득인 근로자가 거래를 한다는 뜻이다. 이제 최저임금이 1만원으로 오르면 고용이 유지된 근로자는 임금을 더 받겠지만, 1만원 아래 일자리는 없어지게 된다. 중소상공인 소득이 근로자에게 강제 이전되고, 저숙련자부터 실업자가 되는 것이다. 근래에 자영업 폐업 증가, 저소득층 소득 감소, 실업률 상승, 마이너스 성장 등이 일어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40% 가까운 근로자가 국가가 정한 임금을 받게 한, 사실상의 임금통제를 한 결과다.

주 52시간 근로의 강제도 일할 자유와 기업할 자유를 제약한다. 이들은 생산 활동을 축소시켜 노사 모두가 노동시장 거래를 통해 얻을 수 있던 이득이 허공으로 사라지게 한다. 자영업을 살린다며 카드수수료 인하, 임대료 규제와 같은 2차적인 가격통제를 하면 그런 손실은 더욱 불어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일자리가 사라져 실직한 사람들이 자립능력을 잃은 복지수혜자가 돼 삶을 국가에 의존하는 ‘예속적인 인간’이 돼버린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부담 증가를 완화하기 위해 영세사업장에 지원해주는 일자리안정자금 중 500여억원이 잘못 지급된 사실이 문제가 됐다. 그러나 애초 3조원 가까운 일자리안정자금 자체가 최저임금 인상이 없었더라면 멀쩡히 존재했을 일자리 유지를 위해 지출되는 재정낭비다. 이번에 드러난 부정수급은 국가주의적인 시장 개입이 국민을 타락시킨 작은 예에 불과하다.

하긴 2년간 70조원 가까운 일자리 예산을 퍼부었음에도 풀타임으로 환산한 비농업부문 고용은 20만 명가량 줄어든 실정이다. 큰 규모의 불필요한 재정 지출을 하게 만든 반(反)시장적인 정책의 입안가들에게 국고손실 책임을 묻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다른 한편, 국민연금을 통한 경영권 개입, 기업 지배구조 변경 압력, 임원선출권 제한 등의 재산권 흔들기도 진행된다. 대기업을 표적으로 한 자의적인 법 집행도 목도된다. 이런 국가주의적 경제개입은 한국 경제의 번성을 가능하게 한 포용적인 시장의 근간을 허무는 일이다. 이념색이 강한 그런 정책들을 사용한 결과는 암울한 경제상황으로 이미 우리 앞에 돌아와 있다. 아직은 숨이 붙어 있는 포용적인 경제를 살리라고, 경제의 자유를 허(許)하라고 외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