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 진념 전 경제부총리는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야당) 총재를 찾아갔다. 진 전 총리는 이 전 총재에게 “총재님도 대통령 되시는 게 바람일 텐데 경제 망가지고 대통령 되면 무슨 소용입니까. 경제, 민생에는 여야가 없다는 큰 생각으로 도와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2001년은 외환위기의 여파가 남아 있었던 데다 미국 정보기술(IT)주 거품 여파로 경제가 흔들리던 때다. 그런데 국회의 계속된 정쟁에 기업 구조조정, 투자 활성화 등 주요 현안이 공전하고 있었다. 이에 진 전 총리가 야당 총재를 직접 만나 “경제 문제를 함께 풀자”고 부탁한 것이다. 진 전 총리의 진심어린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이 전 총재는 “협조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성사된 것이 관가에 ‘전설’로 내려오는 ‘1박 2일 합숙토론’이다. 여야 정책 지도부와 장관 5명 등 약 20명이 충남 천안 정보통신공무원교육원에 모여 묵은 숙제들에 대해 난상 토론을 벌였다.

시간이 흐르며 대부분 사안은 접점을 찾아갔지만 현대건설 구조조정 문제는 야당이 “청산만이 답”이라며 끝까지 버텼다. 이때 진 전 총리는 비보도를 전제로 회사의 상황을 낱낱이 전하며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그 결과 기업구조조정촉진법 입법, 공적자금 회수, 주택산업 및 첨단산업 육성 등 6개 사안에 대해 합의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살아 있는 경제리더십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경제는 기울어가는데 경제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역대 경제부총리 및 기획재정부 장관의 리더십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우리 경제의 고비 때 해결사 역할을 수행한 진념, 이헌재, 권오규, 강만수, 윤증현, 박재완 등이다. 이들은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뛰어난 소통 능력과 강단 있는 추진력 등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기재부 출신인 한 전직 차관은 “오늘의 정책 여건이 과거와 많이 달라졌지만 경제부총리의 권한과 책임은 여전히 작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모범 사례에서 시사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야당도 자기 사람 만드는 탁월한 소통능력

진 전 부총리가 재임하던 2000~2002년은 외환위기를 어느 정도 넘은 상태였지만 여전히 경제가 불안했다. 금융안정 측면에서는 예금 부분보장제 도입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금융회사가 파산했을 때 정부가 일정 부분 예금 반환을 보장해주는 제도다. 2000년만 해도 외환위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원금 전액보장제’를 운영하고 있었고 정부는 금융 안정과 도덕적 해이 방지를 위해 부분보장제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를 두고 서민과 금융회사의 불안이 컸는데 진 전 장관은 이해관계자들을 일일이 만나며 전환 불가피성을 설득했다.

특히 언론의 입장이 중요하다며 기자들을 만나 한도가 얼마가 적당한지 의견을 수렴해 5000만원 한도로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충분한 의견 수렴 과정이 있어 뒷말도 거의 없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6~2007년 경제를 이끌었던 권오규 전 부총리도 정책 조정 능력이 발군이었다고 평가받는다. 다른 부총리보다 카리스마는 약하지만 높은 전문성을 기반으로 주요 현안마다 부처들의 협조를 잘 이끌어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서비스산업 발전방안, 자본시장통합법 제정 등이 권 전 부총리 조정 능력의 결과물이다.

강단 있는 추진력으로 난관 돌파

2000년과 2004년 두 차례 경제 수장을 맡았던 이헌재 전 부총리는 재임 내내 경제가 어려웠다. 김대중 정부 시절 외환위기가 한창일 때 금감위원장과 재경부 장관으로 기업 구조조정을 수행해야만 했다. 당시 이 전 부총리는 구조조정에 대한 원칙을 세운 뒤 흔들림 없이 추진해 위기 조기 극복에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4년 이른바 ‘카드 대란’ 사태로 경제가 흔들렸을 때 종합투자계획, 종합부동산세 도입, 자영업 대책 등 굵직한 대책을 쏟아냈다. 청와대 ‘386세대’들의 견제와 반대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뚝심 있게 정책을 관철시켰다. 2004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 가결로 극심한 혼란이 일었을 때는 “경제 문제만큼은 내가 책임지겠다. 국민 모두 경제활동에 전념하며 힘을 보태주기 바란다”는 대국민성명을 발표했다. 국제신용평가사를 직접 찾아가 신용등급 하락을 막기도 했다. 이후 시장의 신뢰로 경제가 호전되면서 ‘이헌재 효과’라는 말도 나왔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임명되던 2009년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였다. 그가 제일 처음 한 일은 2009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3%에서 -2%로 낮춘 일이었다. 내부 반발이 있었지만 윤 전 장관은 ‘플러스 성장이 어렵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정면 돌파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사상 최대인 28조원 규모 추가경정예산안을 짰다. 재정 건전성에 대한 국회 우려가 많았지만 ‘위기를 돌파하려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득해 통과시켰다. 중소기업을 위한 신용 보증 확대, 규제 완화 등도 속도감 있게 추진했다.

그 결과 2009년 성장률은 0.3%를 기록하고 이듬해는 6.2%로 급반등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빠르게 금융위기를 극복했다. 해외 언론들은 “교과서에 교재로 삼을 법한 경제회복”이라고 평가했다. 윤 전 장관은 특유의 배짱과 포용력으로 ‘따거(큰형님)’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역대 경제수장 가운데 보스형 리더십의 상징이 됐다.

서민준 기자 moran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