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사회주의 색깔이 짙은 경제 정책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경제민주화’란 설익은 정책으로 잉태된 씨앗이 문재인 정부 1년 만에 싹을 틔워 개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일부 시민단체와 노동계가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상당수 국민의 작품이나 마찬가지다. 대통령 지지율이 80%를 넘지 않는가.

이런 상황이니 만큼 우리의 사회학자, 경제학자, 그리고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한 거대담론은 일단 제쳐 놓기로 하자. 당장 우리나라 대기업, 특히 삼성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삼성 이슈의 향배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비단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재인 정부 대기업 정책에 대한 기업 대응책의 지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천하의 삼성이 못 견딘다면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은 알아서 기어야지’ 하는 쑥덕공론이 조찬 모임에서 또 저녁 술자리에서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삼성은 ‘적폐 종합선물세트’로 몰려 있다. 우선 그룹 차원에서는 이재용 부회장의 대법원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다. 순환출자를 해소하라는 압박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생산 공정을 공개하라는 요구와 함께 자회사의 노조 파괴 활동에 대해서도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노조 문제는 자회사 차원을 넘어서서 무노조 경영을 표방해온 그룹의 경영철학과 충돌할 것이다.

삼성의 금융 부문에 대한 주문도 각양각색이다.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은 보험 계약자 입장에서는 최고의 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못할 짓이라도 한 듯 처분을 종용받고 있다. 가장 최근에 불거진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문제는 시비를 위한 시비가 아닐까 할 정도다. 첩첩산중에 사면초가가 아닐 수 없다.

삼성에 주어진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첫 번째는 버티기 전략이다. 법적인 문제에는 법대로 대응하고 공정거래위원회, 금융위원회 등 정부 압박에는 방어논리를 세워 최대한 현재 상태를 지켜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부와 사회의 요구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처리 문제는 법을 따지기 이전에 공정위 요구를 수용한다거나, 순환출자 해소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부의 불편한 심기를 달래는 것이다.

세 번째 선택지는 다소 과격하지만, 삼성이 금융 부문을 아예 포기하는 것이다. 이 경우 순환출자 문제가 상당 부분 해결되고, 보험 계약자의 돈을 지배력 강화나 산업 부문 지원에 쓰려 한다는 의혹을 일거에 불식시키는 장점이 있다. 삼성이 금융 부문까지 매각함으로써 지분율에 연연하지 않고 전문경영자 집단으로서 삼성전자를 계속 키워 나가는 데 전력을 다하겠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내외에 밝히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이 경우 생길 수 있는 문제는 명확하다. 누가 사갈 것인가와 지배력 문제는 없을 것인가다.

작년 말 기준 삼성전자의 내부지분율 합계는 20.11%다. 삼성생명을 처분한다면 삼성의 내부지분율은 11.88%로 떨어진다. 여기에서 정답이 없는 문제가 튀어 나온다. 안정적인 지분율은 얼마인가? 20%는 안전하고 11%는 불안한가? 누가 사갈 것인가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쉬워 보인다. 삼성생명의 시가총액은 약 22조원, 삼성화재는 12조원으로 둘 다 규모가 만만치 않지만 회사별로 20% 정도의 지분만 산다고 가정하면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소화가 가능하다. 오히려 삼성 금융 부문 임직원들 사기와 고용안정성이 더 큰 문제일 텐데, 그동안 여러 삼성 계열사 매각 작업을 매끄럽게 해낸 경험을 살리면 이 또한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필자는 전직 삼성 금융 부문 고위 임원 출신이다. 자신이 몸담았던 기업 부문의 매각을 거론한다는 것은 욕먹기 딱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삼성이, 또 한국 기업들이 처한 상황이 그만큼 엄혹하기 때문이다. 위의 세 가지 옵션 외에도 삼성은 많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대를 꿰뚫어 보는 혜안과 위기를 돌파해 나가는 지혜, 그리고 백척간두에서도 진일보할 수 있는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