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태 드러난 해외 북한 무역상…비밀무역, 외화벌이 앞장

북한의 비밀무역과 외화벌이 실상이 지난해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발생한 김정남 독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 독살 사건과 관련해 조사받다 북한으로 추방된 이정철의 문자메시지와 이메일 등에 북한 공작원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신문은 ‘북한의 비밀 군대-해외 공작원들이 어떻게 북한 체제를 돕고 있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말레이시아 당국이 압수한 이정철의 노트북 세 대와 휴대전화 네 개, 태블릿PC 한 대에 담긴 자료를 자세하게 분석해 외화벌이와 비밀무역에 앞장 선 북한 요원의 삶을 재구성했다.

WSJ에 따르면 이정철은 말레이시아에서 아내, 두 아이와 함께 수영장과 체육관이 딸린 아파트에 살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사업가였다. 하지만 실제 그의 삶은 완전히 달랐다.

이정철은 수십만 달러 상당의 야자유와 비누 등을 도매로 사들여 북한 군부가 통제하는 신광경제무역총회사에 수출했다. 이들 물품은 유엔 제재대상 품목은 아니지만 신광경제무역총회사는 미국과 유엔의 제재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이정철과 현지 업자 간에 오간 문자메시지에는 ‘1만달러 이상은 송금하지 말라’ ‘서류에는 기념품 구입 대금으로 적어라’ 등 감시를 피하기 위한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정철은 유엔의 사치품 제재를 교묘하게 피해 25만달러 어치의 이탈리아산 와인 5만병도 조달해 북한으로 보냈다. 또 북한이 중거리 미사일 발사에 이용할 수 있는 산업용 중고 크레인 구입을 시도했고 러시아를 경유한 북한산 석탄 수입이나 말레이시아 북서부 지역에서의 쌀 재배 등 다양한 돈벌이 구상을 했다. 중국인 해커와 함께 미국의 의료 소프트웨어를 훔치는 계획도 세웠다.

이정철은 2013년 말레이시아 한 약재상의 신원 보증으로 취업비자를 받아 가족과 함께 입국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약재상은 종양을 치료하는 버섯 추출물을 개발한 이정철의 삼촌을 만나러 북한에 갔다가 버섯 추출물 수출을 돕겠다는 제안을 받고 신원보증을 선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은 “북한은 우호 관계에 있는 국가와의 무역을 위해 수십 년간 공작원을 파견해왔다”며 “이들은 대개 대사관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미국과 유엔은 파키스탄 내 불법 주류 판매와 아프리카에서의 무기 판매, 방글라데시에서의 금 밀수 등도 북한 공작원들의 소행인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WSJ는 다음달 12일로 예정된 미·북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북한이 개혁·개방의 길로 갈 가능성이 커져 해외 비밀조직의 중요성이 줄어들 수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회담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북한은 이미 국제사회의 제재를 피해갈 수 있는 해외 네트워크를 구축했기 때문에 큰 타격은 받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정철은 말레이시아 수사당국으로부터 김정남 암살범들의 도주 차량을 제공했다는 의심을 받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그는 지난해 3월 북한으로 추방됐다.

베이징=강동균 특파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