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으름이 풍년 - 정끝별(1964~)
쩍 벌어진 으름 씨는 새가 먹고
굴러 떨어진 헛이름은 개가 먹고
갓 벌어진 주름은 내가 먹고

군침 흘리던
해어름 먹구름은
나와 개와 새를 으르며
붉으락 붉으락 으름장을 펼쳐놓고

아뿔싸 입에 쩍쩍 들러붙은
가을 게으름이라니!

음 물큰한 처음
졸음처럼 들척지근한 죽음
음음 잘 익은 울음

오랜 으름 다 먹었다


시집 《은는이가》(문학동네) 中

추석을 앞두고 벌초하러 산길을 오르는데, 으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으름은 검은 씨가 총총 박혀 있어 새들의 먹잇감으로도 좋지만, 가을이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식감을 자랑합니다. 입맛 없을 땐 그만이죠. 으름을 보고 “입에 쩍쩍 들러붙은 가을 게으름”을 발견하는 시인의 눈이 아름답습니다. 그 으름 하나 벌었기에, 오늘은 말벌처럼 붕붕거리는 맛의 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이소연 < 시인 (2014 한경 청년신춘문예 당선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