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웅 극단 마방진 대표는 “쉽고 단순하지만 울림이 있는 연극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고재연 기자
고선웅 극단 마방진 대표는 “쉽고 단순하지만 울림이 있는 연극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고재연 기자
“주변에서 극단 운영 10주년의 소감을 물을 때마다 1999년 신춘문예에 당선됐을 때가 생각납니다. 기원에서 바둑을 두다가 연락받았는데 막상 그 기쁜 소식을 전할 데가 없어서 탁자가 네 개뿐인 순댓국집에 가서 혼자 소주를 마셨어요. 당선만 되면 요란하게 파티를 벌이려고 했는데 결국 자축한 거죠. 그때와 기분이 비슷해요. ‘이제 시작이구나’ 싶은….”

극작가 겸 연출가 고선웅 씨(47)에게 극단 마방진 창립 10주년의 소감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제 최소한 ‘연극이란 이런 거 아닐까’라는 얘기는 할 수 있게 됐다”며 “면허증을 딴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연극계에서 최고 주가를 올리고 있는 극작가 겸 연출가다. 올해만 6개 작품을 무대에 올렸거나 준비 중이다. 연극 ‘푸르른 날에’와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재공연해 만석 행진을 이어갔고, 창작뮤지컬 ‘아리랑’(7월11일~9월5일, LG아트센터)도 초연 무대에 올렸다. 극단 마방진 창립 10주년 기념 작품으로는 연극 ‘홍도’(8월5~23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와 ‘강철왕’(8월14~30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을 준비했다. 가을에는 국립극단에서 신작 연극 ‘조씨고아’(11월4~22일, 명동예술극장)를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내년 5월 프랑스 대표 공연장인 테아트르 드 라빌의 초청을 받아 창극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광고회사에 다니던 그는 1999년 희곡 ‘우울한 풍경 속의 여자’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연극계에 첫발을 들였다. 2005년 극단 마방진을 창립하고 리듬감 있는 화술과 생기 넘치는 에너지, 다소 과장된 움직임 등으로 대표되는 작품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2010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각색한 ‘칼로 막베스’로 동아연극상 등 각종 연극상을 휩쓸었다.

그의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아주 쉽고 명쾌하다. 사랑의 가치를 지키려는 여자 홍도, 색(色)을 통해 생명력을 그린 옹녀가 그렇다. “젊었을 땐 말이 주는 기교에 취해 있었어요. 그러다 나이가 드니 진부한 경구에 더 끌리더라고요. 사랑, 효, 충성, 의리…별 거 아닌 소재일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삶을 뒤흔드는 가치들이에요. 이제 어렵고 복잡한 것은 ‘가짜’ 같습니다. 쉽고 단순하지만 울림이 있는 연극을 하고 싶어요. 제 작품은 앞으로도 점점 더 단순해질 겁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푸르른 날에’와 일제 강점기 민초들의 삶을 그린 ‘아리랑’ 등 무거운 역사적 상처도 그만의 ‘애이불비(哀而不悲·슬프지만 겉으로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음)’ 정서로 풀어낸다.

“슬픈 걸 꼭 말로 표현해야 아나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죽기 전 슬픈 눈길을 보낼 수도, 감정적인 대사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요. 그런데 그게 훨씬 더 슬프죠. 연출을 하면서 늘 고민하는 부분입니다.”

지루한 것은 참지 못한다는 그의 작품은 재밌다. 현대적이면서도 절제된 화법과 배우들의 과장되고 대비되는 움직임, 거기서 뿜어나오는 에너지까지. 지난 5일부터 공연 중인 연극 홍도는 시작부터 관객의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홍도가 오빠의 학업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기생이 되고, 광호와 사랑에 빠지지만 모략에 걸려 배신당하는 ‘신파극’인데도 말이다.

“보통 극에 몰입하는 시간이 필요하게 마련인데, 시작부터 관객의 웃음이 터져나올 땐 저도 이상해요. 그래도 감사한 일이죠. 그만큼 열린 마음으로 내 연극을 봐준다는 의미니까요.”

‘스타 연출가’라는 칭호에 대한 부담은 없을까.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일본 유학자 사토 잇사이(佐藤一齊)가 쓴 인생지침서 ‘언지록(言志錄)’에 이런 말이 나와요. ‘뜨거운 것은 식고 흐르는 물은 마르며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는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다.’ 뜨거우면 식고 별이라면 지겠죠. 언젠가는 사람들이 돌아서는 날이 올 거예요. 욕심은 없어요. 다만 비난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 혼자 만드는 작품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작품이니까요.”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