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여름부터 1998년 여름까지 세계 날씨는 유난히 이상했다. 인도네시아에서 극심한 가뭄으로 산불이 자주 발생했다. 인도에선 폭염으로 3000여명이 죽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우기(雨期)가 금방 끝나 인도와 태국, 필리핀의 쌀 생산량이 급감했다. 태평양 반대편인 남아메리카에선 물난리가 났다.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이라는 페루의 세추라사막이 호수로 변해버릴 정도였다. 구리 아연 등 광물 생산과 커피 등 작물 재배가 타격을 입었다.

태평양 서쪽과 동쪽의 날씨가 뒤바뀌어 나타나는 ‘엘니뇨’라는 기상 현상이 원인이었다. 5~6년 주기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그해엔 특별히 강력해 ‘몬스터(괴물) 엘니뇨’란 이름이 붙었다. 당시 관련 국가가 입은 경제적 손실은 330억달러(약 39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강력한 엘니뇨가 올해 또다시 기승을 부릴 것이란 전망에 세계 농·축산업자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상 기후로 곡물과 광물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가격이 급등할 가능성이 있어 원자재시장 투자자들도 날씨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1997년 버금가는 슈퍼 엘니뇨 온다”

미국과 호주 기상청은 올해 엘니뇨가 1997년 ‘몬스터’에 버금가는 ‘슈퍼 엘니뇨’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엘니뇨의 강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동태평양의 수온이 평년보다 1.5도 이상 높아졌기 때문이다. 평년보다 0.5도 높은 수온이 지속되면 엘니뇨로 정의하는데 이 기준을 훌쩍 뛰어넘었다.

호주 기상청은 지난 21일 “태평양 모든 측정 지점에서 해수면의 온도가 10주 연속 평균보다 1도 넘게 높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며 “1997년 엘니뇨 발생 때보다 2주나 긴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은 올 3월 엘니뇨 단계를 ‘주의’에서 ‘경보’로 한 단계 올리면서 “올해 말까지 엘니뇨가 지속될 확률이 80% 이상”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엘니뇨가 내년 4월까지 계속되면서 세계 곳곳에 이상 기후를 만들어낼 것으로 보고 있다.

엘니뇨 효과는 겨울이 될수록 강해진다. ‘아기 예수’라는 뜻을 가진 스페인어(엘니뇨)가 붙은 까닭도 이 현상이 크리스마스 무렵 페루 앞바다에서 자주 나타났기 때문이다. 보통 호주 북동부와 동남아, 인도에서는 가뭄이, 동태평양에 인접한 중남미에서는 폭우와 홍수가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슈퍼 엘니뇨를 예고하는 전조는 벌써 나타나고 있다. 미국 기상 전문가들은 이달 들어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나타난 이례적인 폭우와 아열대성 기후가 엘니뇨 세력이 확장하면서 발생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7월은 캘리포니아주에서 1년 중 가장 건조한 때지만 지난 18일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시간당 9.1㎜ 내렸다. 1986년 이후 최대 강수량이다. 마이크 헬퍼트 NOAA 연구원은 “엘니뇨 영향으로 올겨울 캘리포니아 전역에 많은 강수량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소맥·쌀 등 곡물 가격 벌써 들썩여

캘리포니아 가뭄 해소에 도움을 준 최근 비처럼 엘니뇨에 따른 기상변화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5~6년 주기로 나타나는 엘니뇨는 중남미 건조 지역에 비를 내려 꽃을 피우고 가축이 번성하도록 돕기도 한다. 문제는 태평양 서쪽에 가뭄이, 동쪽에 폭우가 지나치게 강할 때다.

세계 경기 둔화로 광물과 곡물 수요가 줄어든 상태지만 투자자들은 연말로 가면서 가격이 반등할 것을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다. 1997년 이후 가장 강력한 엘니뇨가 온다면 긍정적인 효과보다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클 것이란 판단에서다. 연내 미국 기준금리 인상 전망과 중국의 경기 둔화 움직임 등 글로벌 경제 여건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엘니뇨가 신흥국 금융시장의 불안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일부 곡물 가격은 벌써 들썩이고 있다. 옥수수와 밀, 콩 등은 6월 중순 이후 11~24%가량 올랐다. 5월 미국의 기록적인 폭우와 홍수 탓이지만 앞으로 엘니뇨로 이상 기후 현상이 심해지면 공급량이 더 줄어들 것이란 우려도 반영됐다.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지역의 몬순 기간 중 강우량이 장기 평균보다 6% 적었다는 소식에 쌀값도 반등세다. 쌀 재고량이 2008년 곡물 위기 이후 가장 낮다는 분석도 있어 앞으로 국제 쌀 가격이 40% 이상 급등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호주에서는 벌써 가뭄이 시작됐다. 호주국립은행은 올해 밀 생산량이 50% 가까이 줄어들 것이란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호주는 세계 밀 공급량의 14%를 차지한다. 호주에서 밀 농장과 소 농장을 운영하는 게리 한센은 미국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비가 평소의 20%밖에 내리지 않았다”며 “저수지에 남은 물도 한계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인기 생선인 참치도 엘니뇨의 영향을 받는다. 따뜻한 바다에 사는 생선이 중서부태평양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해 동아시아 원양 업체들은 어획량이 늘어나는 수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날씨’란 말이 있듯 날씨를 바탕으로 한 투자에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지난해에도 수온이 높아 엘니뇨가 올 것으로 예견됐지만 엘니뇨는 나타나지 않았다. 구리와 아연 등 비철금속 가격도 아직은 인도네시아와 중남미 등 주요 생산국이 심각한 가뭄과 홍수에 시달리지 않아 가격 하락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엘니뇨를 기대하고 일찍 상품시장 투자에 뛰어들었던 투자자들은 생각보다 가격 상승폭이 크지 않아 힘겨워하고 있다”며 “엘니뇨에 대한 경고는 1년 전부터 나왔기 때문에 ‘늑대가 온다’는 우화처럼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투자자도 많다”고 전했다.

임근호/김은정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