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대자보의 추억
대자보(大字報)는 주로 밤에 써서 새벽에 붙였다. 혹시 누가 볼까 봐 급히 붙이고는 자리를 떴다. 사복 형사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밤을 꼬박 새우며 고치고 고친 ‘철야의 격문’은 금방 찢겨지기도 했다. 그래도 언로가 막혔던 1980년대 대자보는 시대의 양심을 밝히는 횃불이었고, 독재 정권을 향해 던지는 항변의 주먹글이었다.

원래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뉴스나 공지사항을 알리던 게 대자보였다. 로마에서는 카이사르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우리나라에도 옛날부터 벽보(壁報)나 방문(榜文), 민방(民榜), 괘서(掛書) 등이 흔했다. 그러다 뉴스보다는 정치적 주장이나 상대에 대한 비방, 대중선동을 위한 격문이 늘어났다. 1871년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파리코뮌과 1917년 러시아 혁명도 길거리 벽보에서 시작됐다.

대자보라는 단어는 1950년대 중국의 여러 정치세력이 대중선전용으로 써 붙인 벽보에서 유래했다. 조직 내부 소식지나 성명서는 소자보,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벽보는 대자보라 했다. 1966년 마오쩌둥이 톈안먼 광장에서 수십만명의 홍위병을 선동하며 중국을 ‘문화혁명 광풍’으로 몰아넣을 때 활용한 것도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농촌의 담벼락마다 수많은 대자보가 나붙었고 중고생과 대학생으로 구성된 홍위병들은 닥치는 대로 죽창을 휘둘렀다. 대자보 속의 독특한 글꼴은 일본의 좌익 학생운동권에 전해지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 중국 대자보를 계승한 게 아니라 단어만 빌려온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언론자유가 확보되고 특정 정당이나 정파를 지지하는 매체가 생기면서 대자보의 영향력은 줄었다. 몇 년 전 고려대 학생이 자퇴하면서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고 쓴 대자보가 주목을 받았지만 정치적인 반향은 없었다.

시대변화에 따라 대자보는 총학생회 선거와 등록금 문제 등 학내 문제를 다루는 토론장 역할을 했다. 격한 감정에 상대편 대자보를 찢거나 자신들의 대자보를 덧씌우는 일도 생겼다. 그러면서 학내 권력 투쟁의 도구로 변질되기도 했다.

지난주 고려대 경영학과 4학년생의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 이후 대학가가 떠들썩하다. 젊은이들이 ‘하 수상한 시절에 생각 좀 하고 살자’는 걸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파업 노조원들의 ‘직위해제’와 ‘해고’를 구분하지 못하는 지식수준은 한심하다. 그가 진보를 내세우는 정당의 당원이라니 더 그렇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