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테라헤르츠(THz) 포토닉스 창의연구센터 연구진이 실험에 몰두하고 있다. ETRI 제공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테라헤르츠(THz) 포토닉스 창의연구센터 연구진이 실험에 몰두하고 있다. ETRI 제공
경기 안양시 스마트콘텐츠센터에 입주해 있는 스타트업 기업 아이포트폴리오. 이 회사는 올초 534년 역사의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와 전자책 플랫폼 공급 계약을 맺었다. 지난 7, 8월에는 중동 최대 대학인 아랍에미리트(UAE) HCT와 사우디아라비아 PNU대에 옥스퍼드 영어교재를 납품하며 상용화도 시작했다. 설립 2년밖에 안된 스타트업이 이 같은 성과를 올린 배경에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도움이 컸다.

ETRI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공동으로 스마트콘텐츠센터에 입주한 업체를 대상으로 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 어학 교재의 듣기 속도를 조절하는 기능 등 개발 과정의 난제 등을 찾아 이를 해결하는 역할을 맡았다. 김성윤 아이포트폴리오 대표는 “옥스퍼드가 처음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스타트업과 계약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며 “두 차례 한국을 찾아 진행한 실사에서 ETRI 연구원들이 직접 기술 지원을 하는 모습을 본 뒤 계약을 결정했다”고 소개했다.

ETRI의 기술 지원을 받아 성장한 벤처기업 사례다. 이처럼 정부 연구개발(R&D)을 담당하는 출연연구소가 벤처·중소기업을 세계 무대에서 통할 히든챔피언으로 육성하는 R&D 허브로 주목받고 있다. 벤처·중소기업의 취약점으로 꼽히는 R&D 기능을 출연연이 보완하며 상호 발전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어서다.

R&D가 단순한 연구에 머물지 않고 수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데까지 활용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 ‘창조경제’의 핵심 과제이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말 열린 대덕특구 40주년 기념식에서 “출연연구원을 중소·중견기업의 R&D 전진기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히든챔피언 키우는 출연연구원

[일자리 만드는 R&D가 창조경제] ETRI, 5년간 中企 489곳에 기술이전…히든챔피언 키웠다
ETRI의 연구원 5명 중 1명은 최근 5년간 중소기업에 파견 나가 기술 개발을 지원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른바 한국판 ‘히든챔피언’ 육성에 집중한 흔적이다. ETRI는 2009년부터 중소기업을 중견기업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중소기업 상용화 현장지원제’를 운영하고 있다. 올 상반기까지 4년6개월간 1124명의 연구원이 파견을 나갔고 도움을 준 중소기업도 489개사에 달한다.

코스닥 상장기업 코위버는 ETRI와 협업을 통해 회사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데 성공했다. 2011년 차세대 인터넷 기술인 캐리어 이더넷 장비 개발에 참여해 패킷-광 통합 스위치 시스템 핵심 기술을 ETRI로부터 이전받았다. 장비 상용화에 성공한 올해는 KT, LG유플러스, SK텔레콤에 장비 납품까지 시작했다. 지난해 450억원대이던 이 회사 매출은 올해 700억원으로 55% 이상 늘어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현성규 코위버 상무는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신기술을 습득할 기회가 적고 개발에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며 “이번 기술협력처럼 ETRI가 중소기업의 실질적인 연구소 역할을 하는 사업들이 더 확대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위성무선RF기술연구실은 ETRI 내에서 중소기업 지원 성공 사례가 가장 많은 부서 중 하나다. 지금까지 5개 기업을 지원했다. 인천의 무선통신 전문기업 에이스테크놀로지, 수원의 유무선통신기기 개발업체 RFHIC, 대덕의 통신시스템 전문업체인 XMW 등이 연구실의 기술 지원을 받아 해외 수출 등 성과를 내고 있다.

○기술이전 ‘Q-마크’ 부여

ETRI는 2006년부터 사업화본부에 중소기업기술지원팀을 별도로 만들어 중소기업의 기술 개발 애로 사항과 부족한 장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경기 수원의 한진자동문은 이 팀의 도움을 받아 영국에 연간 7만달러 상당의 수출에 성공했다.

영국 소방안전법에 맞게 컨트롤러를 개발해야 했는데 관련 제어기능을 포함한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반 회로설계기술과 펌웨어(프로그래밍) 기술을 ETRI가 개발해준 것.

ETRI는 기술사업화 효과를 높이기 위해 2008년부터 기술 이전하는 모든 기술에 ‘Q-mark’라는 품질보증마크까지 달고 있다. 품질 완성도가 검증된 기술만 외부에 이전해 사업화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이 같은 제도가 안착한 덕분에 ETRI는 기술사업화 측면에서 출연연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성과를 거뒀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간 ETRI가 기업에 기술을 이전하고 받은 수입은 1728억원에 달한다. 5년간 국내 출연연 전체 기술료 수입(3750억원)의 46.1%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현창희 ETRI 사업화본부장은 “사업화에 성공하려면 기술개발뿐만 아니라 시장 대응(Time-to-Market) 능력이 중요한데 중소기업은 인력이나 자원 모든 면에서 열악한 게 사실”이라며 “기술 개발뿐만 아니라 상용화 기간 단축 등에서 중소기업을 적극 지원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tae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