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 복무때 잡화점 운영하던 청년 "고객이 보스" 구호로 개혁 지휘…P&G 10년 전성시대 이끌어
미국의 다국적 생활용품회사 프록터앤드갬블(P&G)은 ‘마케터 사관학교’로 통한다. 세제와 화장품, 유아용품 등 소비자의 일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제품을 주로 판매하면서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티브 발머 마이크로소프트(MS) 최고경영자(CEO)와 제프리 이멜트 제너럴일렉트릭(GE) CEO, 멕 휘트먼 휴렛팩커드(HP) CEO 등 수많은 유명 기업인이 P&G 출신이다.

P&G를 거쳐간 수많은 인재 중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앨런 조지 래플리(66·사진)다. 래플리는 첫 직장인 P&G에서 회장 겸 CEO 자리까지 올랐다. ‘창의적인 마케팅의 산실’이라는 P&G의 현재 명성과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데도 가장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다.

○교사 꿈꾸던 청년, 거대 기업의 CEO로

래플리는 처음엔 비즈니스계에 발을 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원래 꿈은 교사였다. 래플리는 뉴욕주 북부의 해밀턴 칼리지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중간에는 1년간 프랑스로 연수를 떠나 역사와 정치, 예술과 드라마 등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래플리가 소비재 부문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70년 해군에 입대해 일본에 건너가면서부터다. 그가 군복무 때 맡았던 업무는 일본 미군기지 내 잡화점 운영이었다. 당시 그가 근무했던 기지에는 1만여명의 미군과 그 가족들이 지내고 있었다. 이들을 위해 매일 물품을 공급하고, 각종 운송 및 판매 서비스를 담당하는 게 임무였다. 그는 이 일을 하면서 소매업의 매력에 눈을 떴다. 교사 대신 마케팅 전문가로 장래 희망의 방향을 틀었다.

제대 후 미국으로 돌아온 래플리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고, 1977년 P&G에 입사했다. P&G의 주방세제용품 브랜드 ‘조이(Joy)’에서 영업사원으로 일을 시작한 래플리는 이후 15년간 세탁·청소용품 부문에서 일하며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1984년에는 P&G의 대표 세탁세제 ‘타이드(Tide)’의 액상형 제품을 출시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래플리는 1994년 P&G의 아시아지역 총책임자로 일본에 건너갔다. 1999년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일본 내 P&G 영업이익을 흑자로 돌려 놓고, 중국 매출을 5년 만에 9000만달러에서 10억달러로 불렸다. 1999년 미국 본사에서 뷰티용품 부문을 맡고 있던 래플리는 2000년 이사회로부터 P&G의 회장 겸 CEO로 전격 발탁됐다.

○“고객이 보스다”…‘열린 개혁’의 시작

래플리가 CEO직을 이어받았을 때 P&G는 위기일발 상황이었다. P&G의 주가는 반토막이 나 있었다. 전임 CEO였던 더크 야거는 CEO에 오른 지 17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1837년 P&G 창업 이래 최단기 재임 기록이었다.

야거는 “대량 해고와 적대적 인수합병(M&A)만이 살 길”이라며 1만5000여명을 감원하고, 애견사료 업체와 정수기 회사 등 P&G의 주력 업종과 별 연관이 없는 곳까지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독선적이던 야거는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사람은 가차없이 한직으로 밀어내 버렸다. 지나치게 급격했던 그의 체질 개선 전략은 직원들의 불만을 키워 조직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또 M&A에만 치중하다 보니 정작 ‘타이드(세제)’와 ‘크레스트(치약)’, ‘팬틴(삼푸)’ 등 P&G 고유의 주력 제품은 갈수록 경쟁사 제품에 밀려났다.

P&G 이사회는 결국 야거를 내쫓은 뒤 래플리를 후임으로 발탁했다.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온화하고 다른 사람과 융합을 잘 한다’는 평판도 한몫했다. 래플리는 회의 중 3분의 2는 아예 ‘듣는 시간’으로 떼어놓을 정도로 외부 의견 수렴을 중시했다. 그는 “CEO가 왜 그렇게 많은 연봉을 받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난 경청의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지위가 올라갈수록 아랫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스트레스는 정말 대단하다”고 말한다.

래플리가 2009년까지 CEO로 재직하면서 내내 되풀이했던 구호는 “고객이 보스다(customer is boss)”였다. 그는 직원들에게 “사자가 사냥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면 동물원이 아니라 정글로 가야 한다”며 “본인 스스로 고객이 되어 ‘살아보고(living it)’, ‘일해보라(working it)’”고 강조했다.

래플리는 상품 개발과 디자인, 마케팅팀을 함께 뭉쳐 일하게 했다. 세 분야의 직원들이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나 다르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품개발팀은 성능에, 디자인팀은 고객의 감정에, 마케팅팀은 소비패턴에 각각 중점을 뒀다. 고객 등 외부 아이디어를 제품 개발에 활용하는 개방형 연구개발(C&D)을 도입한 것도 래플리의 작품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컬래버레이션 마케팅(collaboration marketing·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동 합작해 제품을 출시하는 마케팅)’의 귀재였던 셈이다.

래플리는 회사에 꼭 필요한 M&A라면 망설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5년 면도기 업체 질레트 인수였다. 래플리는 570억달러를 들여 질레트를 인수했다. 또 2001년 머리 염색약 회사 클레롤을 50억달러에, 2003년에는 독일 미용제품 회사 웰라를 69억달러에 각각 사들였다.

래플리가 P&G를 이끌었던 2000~2009년은 P&G의 최전성기였다. 그가 재임했던 10년간 P&G의 매출은 두 배, 순이익은 네 배 늘었다. 사내 현금도 111% 증가했다.

○퇴임 4년 만에 ‘친정’ 복귀

‘2인자 육성’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래플리는 후임자도 자신이 직접 지명했다. 2009년 그가 고른 후계자는 로버트 맥도널드였다.

그러나 P&G는 맥도널드 취임 후 경쟁사 유니레버에 밀리는 등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선 글로벌 금융위기로 지갑이 얇아진 미국 소비자들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급증하는 신흥국 중산층 인구의 마음을 붙잡는 데도 실패했다. 구조조정을 통한 비용 절감에도 소극적이었다. 실적 부진으로 주주들의 불만이 쌓였다. 급기야 지난해 여름에는 행동주의 투자자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회장이 새 ‘먹잇감’으로 P&G를 골랐다. 그는 실적 개선이 없으면 맥도널드를 해고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P&G 이사회는 결국 지난 5월 맥도널드를 경질하고 래플리를 다시 ‘구원투수’로 불러들였다. 시장점유율 확대와 인력 구조조정을 동시에 성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래플리뿐이라는 판단에서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