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축구 대표팀 새 사령탑 후보로 지목된 홍명보(44) 감독은 선수와 지도자로서 모두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축구 스타'다.

선수 시절이던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사상 첫 4강 신화를 쓰는 데 앞장선 그는 정확히 10년 뒤 런던올림픽에서 선수들을 이끌고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거뒀다.

1990년대 한국 축구 간판스타로 꼽히는 홍명보 감독은 광장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시작, 동북고, 고려대를 거쳤다.

이후 프로축구 포항, 일본 프로축구 벨마레, 가시와에서 활약했다.

2004년 미국 프로축구 LA갤럭시에서 선수 생활을 접었다.

대표 선수로 화려한 이력을 남겼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부터 대표팀 중앙 수비수를 맡은 그는 2002 한일월드컵까지 꼬박 4차례 연속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특히 2002년에는 거스 히딩크 감독 지휘 하에서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공수를 조율한 그는 한국의 월드컵 4강 신화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꼽힌다.

평소 무표정한 얼굴이 트레이드 마크지만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로 나서 한국의 4강 진출을 확정하고 환하게 웃는 모습은 아직도 팬들의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돼 있다.

'영원한 리베로'라는 별명과 함께 국가대표 A매치에 136경기 출전, 한국 선수 가운데 최다 A매치 출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현역에서 은퇴하고서도 긴 공백 없이 지도자 길로 들어섰다.

홍명보 감독은 딕 아드보카트 감독의 요청으로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대표팀 코치를 맡았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도 코치를 맡았다.

2009년 2월 20세 이하 대표팀 사령탑에 앉으면서 처음 감독으로 데뷔했다.

데뷔 초부터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홍명보 감독은 그해 한국을 이집트에서 열린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18년 만에 8강에 올린 데 이어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내며 지도력을 입증했다.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 김보경(카디프시티), 김영권(광저우), 오재석(감바 오사카), 윤석영(퀸스파크 레인저스), 이범영(부산) 등 올림픽 주축 멤버들도 이때부터 길렀다.

올림픽 5개월을 앞두고 한국의 7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을 이뤄낸 홍명보 감독은 런던에서 한국을 조별리그 2위(1승2무)에 앉히며 8강으로 이끌었다.

한국 축구가 올림픽 8강에 오른 것은 1948년 런던, 2004년 아테네 대회에 이어 세 번째였다.

기세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한국은 영국과의 8강전에서 홈 텃세를 극복, 승부차기 끝에 4강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브라질과의 준결승에서 0-3으로 져 아쉬움을 삼켰지만 3-4위전에서 숙적 일본을 2-0으로 꺾고 한국 축구 사상 처음으로 메달을 목에 거는 영광을 누렸다.

선수와 감독으로서 팀을 성공적으로 이끈 비결로 홍명보 감독의 엄격하면서도 부드러운 리더십이 꼽힌다.

공식 석상에서 좀처럼 웃지 않아 딱딱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홍명보 감독은 선수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형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와일드카드 박주영(셀타 비고)이 병역 기피 논란에 휩싸였을 때도 박주영을 앞장서서 감싸는 등 선수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신뢰를 드러낸다.

홍명보 감독의 신뢰에 선수들도 "감독님만 따르면 된다"며 강한 믿음으로 화답했다.

올림픽 대표팀을 성공적으로 이끌고서 홍명보 감독은 차기 사령팁 후보로 지속적으로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홍명보 감독은 "아직 맡을 때가 되지 않았다"며 고사, 스승인 히딩크 감독이 있는 안지 마하치칼라(러시아)로 1월 연수를 떠났다.

지난달 말 연수 일정은 모두 끝났다.

홍명보 감독의 연수 종료 시점과 최강희 감독의 사퇴 시점이 얼마 차이 나지 않아 홍 감독이 차기 사령탑에 오르리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수현 기자 porqu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