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단위의 여가활동이나 나들이를 할 여유도, 기회도 별로 없었던 1970~80년대 초등학생들에게는 두 가지 즐거움이 있었다. 봄 소풍과 가을 운동회다. 봄 소풍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김밥과 삶은 계란, 사이다 등 주로 먹을 것들이다. 반면 가을 운동회 하면 첫 번째로 생각나는 건 청·백군이 겨루는 릴레이 경주다.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응원 속에서 학생은 물론 선생님과 부모님, 그리고 인근 마을 주민들까지 바통을 이어받아 달리다 보면 운동회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곤했다. 마음이 몸을 훨씬 앞서 달리다가 그만 넘어지고 마는 어르신들도 한두 분씩은 있었다.

운동회는 1746년 영국 웨스트민스터 학교에서 크리켓 교내 경기대회가 열린 게 효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896년 5월2일 동소문 밖 삼선평(평양의 삼선평이라는 설도 있음) 영어학교에서 처음 시작됐다. 당시엔 조정 대신들과 각국 공사 등 내외 고관도 참석했는데 운동장 둘레에 붉은 깃발을, 입구와 대청에는 만국기를 나부끼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종목은 300보 경주, 대포알 던지기, 멀리뛰기, 높이뛰기 등이고 당나귀 경주도 인기였다고 전해진다. 청·백군으로 나누어 겨루는 운동회는 일제시대에 정착돼 지금에 이른다.

정치적 격랑기였던 70년대에는 운동회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1970년대 초 운동회 관련 잡부금 징수 비리와 1972년 서정쇄신 바람으로 뜸해지더니 1975년부터는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되살아났으나 경기종목까지 정부가 지정하는 등 간섭이 심해져 반발도 적지 않았다. 1979년에는 권장사항이던 운동회를 연 1회 의무화하고 학교당 30만원씩 나라에서 경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렇게 명맥을 유지해오던 운동회가 최근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5882개 초등학교 중 487개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지 않았다. 서울은 더 심해 591개 중 224개 학교가 하지 않았다. 10개 중 4개꼴로 포기한 셈이다. 학교 측이나 학생 학부모 모두 별 관심이 없는 데다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인 학교는 시끄럽다는 민원 때문에 할래야 할 수도 없다고 한다. 운동회가 없어진다니 입시 위주 교육의 폐단, 운동부족과 아동비만, 이기주의 등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많다. 다 일리 있는 지적들이다. 더 안타까운 건 아이들이 커서 어린시절을 회상할 때 떠올릴 추억거리가 하나 사라진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