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로 넘어간 UAE 원전…MB, 왕세자에 밤낮으로 통화 후 '대반전'
이명박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 협상의 최종 담판을 위해 아부다비공항에 도착한 2009년 12월26일. 이례적으로 공항까지 영접을 나온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 아부다비 왕세자는 이 대통령에게 자신의 리무진에 같이 탈 것을 권유했다. 왕세자는 운전석 셔터를 올리더니 대뜸 “사실 내가 기독교병원(영국 식민지 때 설립된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 병원에 기부금도 냈다. 나는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고 말했다. 기독교 신자인 이 대통령에게 ‘경계심을 갖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모하메드 왕세자는 또 “내일 저녁 ‘그랜드 모스크’에 함께 방문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랜드 모스크는 UAE 근대화의 기틀을 다진 자이드 전 대통령(왕세자의 부친)의 무덤 옆에 세운 최신 이슬람 사원이다. 이 대통령은 ‘아버지가 묻힌 곳에까지 함께 가자고 하는 걸 보니 우리 노력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대통령은 차 안에서 왕세자에게 “한국 특전사를 보내 아부다비 왕실 경호원들을 훈련시켜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걸프만을 사이에 두고 이란과 대치해 있는 UAE가 군사협력을 중시한다는 점을 간파한 전략이었다.

다음날인 27일 오후 UAE원자력공사(ENEC)는 한국전력컨소시엄을 원자력 사업 프로젝트(400억달러 규모)의 최종 사업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이 대통령이 “탈락한 것 같다”는 보고를 받은 지 50여일 만에 이뤄진 대반전이었다. 외신들은 UAE가 프랑스 대신 한국을 사업자로 선정한 것을 두고 ‘놀라운 선택’이라는 뉴스를 전 세계에 타전했다.

○“의전 개의치 말고 전화하라”

佛로 넘어간 UAE 원전…MB, 왕세자에 밤낮으로 통화 후 '대반전'
2009년 11월 초만 해도 한국은 UAE 원전 수주에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하메드 왕세자는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을 아부다비로 불러 11월4일 면담한 자리에서 “프랑스에 줄 수밖에 없다. 한국은 사업자로 선정하기 어렵다”고 통보했다. 11월25일께 프랑스와 계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얘기도 현지에서 흘러 나왔다. 이 보고를 받은 이 대통령은 “내가 직접 통화해볼 테니 왕세자에게 전화를 연결하라”고 지시했다. 왕세자는 칼리파 빈 자이드 알 나하얀 UAE 대통령의 동생으로 원전 사업의 총책임자였다. 오후 3시, 5시, 6시 세 차례나 연결을 시도했지만 왕세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외교 참모들은 외교 프로토콜(의전)상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한국의 수십년 먹거리가 달린 일인데, 밤이고 낮이고 계속 전화하라”고 말했다. 통화를 시도한 지 이틀 만인 6일 왕세자와의 전화가 연결됐다. 당시 통화에서 이 대통령의 발언. “외교부 장관의 보고를 받았다. 이미 결정됐다고 하니 부담 갖지 말고 우리 실무진을 좀 만나 달라. 한국은 UAE와 형제국과 같은 관계를 맺고 진심으로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모하메드 왕세자는 “원전 사업은 이미 결론이 났기 때문에 한국과 만날 필요가 없다”며 거절했다. 1주일 뒤 이뤄진 두 번째 통화. 이 대통령은 “우리는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열성과 열의를 갖고 있다. 세계에서 모범적인 원전 단지를 만들어 형제국과 같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자”고 다시 제안했다. 이 대통령의 집요한 설득에 모하메드 왕세자는 “그럼 일단 사람들을 보내봐라. 원전 사업은 5주일 정도 결과 발표를 미루겠다”며 조금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MB 코펜하겐 출장 중 ‘낭보’

이 대통령은 곧바로 정부 특사단 구성을 지시했다. 한승수 전 국무총리를 단장으로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 김태영 국방부 장관 등 40여명으로 이뤄진 특사단은 11월18일 비밀리에 UAE를 방문했다. 특사단엔 정부 관계자 외에 현오석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서남표 KAIST 총장, 정동수 KOTRA 인베스트코리아 단장 등도 합류했다. 이 대통령은 왕세자 앞에서 진행할 영어 프레젠테이션(PT)을 특별히 잘 챙기라고 당부했다.

당시 지경부 자원개발원자력정책관이었던 강남훈(현 청와대 지식경제비서관)의 회고. “특사단 구성 지시가 내려오자 며칠간 밤을 새워 양국 간 포괄적인 경제협력 사업을 준비했다. 정 단장이 왕세자 앞에서 이 협력 방안을 PT했다. 원전 사업은 100년을 가는 것인 만큼 한국이 사업자로 선정되면 정보기술(IT) 분야를 비롯해 인력 양성 등 수십개 분야에서 파트너가 될 것이란 점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특사단이 귀국한 뒤에도 모하메드 왕세자와 네 차례 더 통화했다. 조금씩 달라지는 왕세자의 말에서 ‘희망’을 발견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대통령은 첫 특사단 파견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보충해 11월24일 2차 특사단을 아부다비로 파견했다. 다시 강남훈의 증언. “이때부터 UAE는 한국이 원전 수주만 하려는 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할 의지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12월10일 이뤄진 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모하메드 왕세자는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대규모 특사단을 보내주고 실질적인 협력 방안을 제시해 고맙다. 다음주쯤이면 뭔가 가시적인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역전의 낭보는 이 대통령이 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덴마크 코펜하겐을 방문하던 기간(12월7~19일)에 전해졌다. UAE로부터 “최종 협상을 위해 이 대통령이 직접 방문해 주면 좋겠다”는 전화가 걸려온 것. 이 대통령을 초청한 건 최종 사업자로 한국을 낙점하겠다는 뜻을 사실상 밝힌 셈이었다.

이 대통령은 UAE 원전 수주 성공에 대해 “국운이 따랐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업인으로 수십년간 을(乙)의 입장에서 비즈니스를 해온 이 대통령의 경험이 진가를 발휘했다는 평가가 많다. 현대건설에서 이 대통령과 함께 일했던 한 인사의 회고. “이 대통령은 현대건설 사장 시절 사업을 따내기 위해 중동 국가의 왕족이 휴가를 즐기고 있는 프랑스 휴양지까지 찾아갔던 사람이다. 무엇보다 중동 비즈니스의 노하우를 잘 알고 있다. 그에겐 격식을 따지는 게 큰 의미가 없다. 격식을 따졌더라면 UAE 왕세자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을 것이고, 대역전의 드라마도 없었을 것이다.”

특별취재팀 차병석 정치부 차장(팀장), 이심기 경제부 차장, 서욱진 산업부 차장, 류시훈 금융부 기자 mbnomics@hankyung.com

keyword 한국형 원전

한국 실정에 맞게 국내 기술로 개발한 원자력발전소. 1984년 정부의 원전기술 자립계획에 따라 미국의 ABB-CE사의 시스템80을 기준 모델로 삼아 축적된 국내 원전기술과 국내외 최신설계기준을 적용해 개발했다. 한국형 원전 1호는 1998년 완공한 울진 3호기(OPR-1000).

아랍에미리트(UAE)에 건설하는 한국형 원전은 OPR-1000이 업그레이드된 APR-1400 모델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이 1992~2002년 2300억원을 투입해 개발했다. OPR-1000과 비교해 발전용량이 1000㎿에서 1400㎿로 커졌다. 가동 수명은 40년에서 60년으로 늘었다. 한국이 UAE 원전을 수주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APR-1400의 경쟁력 때문이다. 프랑스 아레바의 최신 원전 모델 EPR-1600과 비교하면 건설비는 20% 이상 저렴하다. 국내에서는 2013~2016년 가동에 들어가는 신고리 3, 4호기와 신울진 1, 2호기가APR-1400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