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포장재 하나 바꿨는데…年100억 절감
소비자가 구입한 냉장고는 종이상자에 싸여 집 앞까지 온다. 보통 집 밖에서 포장을 벗겨 들여놓고 종이상자는 바로 버려진다. 이렇게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종이상자 값만 2만원 이상이다. 종이상자 80개를 만들려면 30년생 나무 17그루(펄프 1t을 만드는 데 필요한 분량)가 필요하다.

“야채 운반통, 탄산음료 박스 등은 다시 쓰는데 왜 냉장고 포장은 한 번 쓰고 버릴까.” 지난해 여름 이영근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 선행디자인팀 수석은 이런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다시 쓸 수 있는 재사용 포장 개발의 시작이었다.

삼성전자는 지난 22일 세계 최초의 친환경 포장을 선보였다. 종이와 스티로폼을 이용했던 1회용 냉장고 포장재를 친환경 소재인 무독성 폴리프로필렌(EPP)으로 바꾸고 40회 이상 쓸 수 있도록 했다.

○재료 찾아 한 달간 시장 돌아

세계 최초로 재사용 포장재를 개발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디자인팀은 다시 쓸 수 있을 만큼 가볍고 튼튼하며 부피가 작은 재료를 구하러 동대문, 남대문 등 시장이란 시장은 다 돌아다녔다. 한 달 넘게 찾아 헤맨 끝에 세 가지 조건에 맞고 친환경적이며 오래 쓸 수 있는 무독성 폴리프로필렌을 찾아냈다.

이 수석은 “아이디어와 재료를 제품으로 실현하기 위해 개발, 설계 등 전사적인 협력이 필요했다”며 “임원들이 적극적으로 도와 전사적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최지성 부회장, 윤부근 사장 등 경영진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며 적극 지원했다.

박형욱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 개발팀장(수석)이 여기에 힘을 보탰다. 박 수석은 “지난해 9월 디자인팀의 제안을 받고 ‘바로 이거다’ 싶었다”며 “친환경 포장재를 개발하고 싶었는데 아이디어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제품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심도 있었지만 회의를 거듭하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반 년 넘게 1주일에 2번, 경기 수원과 서울 서초동을 오가는 회의가 계속됐다. 광주광역시에 있는 생산공장과의 협업을 위해 화상회의도 수시로 열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몇 번이나 재사용할 수 있나’를 정하는 것이었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검증 방법도 없었다. 물류, 유통업체, 설치기사들의 목소리를 듣고 실험을 거쳐 40회 정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결론을 냈다.

○세계 최초 포장재 추적 시스템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재사용을 위해서는 포장재가 다시 공장으로 들어오는 단계별 재고 관리가 핵심이다. 상단부, 하단부, 몸체 두 부분 등 총 4개 부분으로 나뉜 제품을 하나로 추적·관리하기 위한 시스템 구축이 필요했다.

박 수석은 “바코드를 부착해 몇 번이나 사용했고 어디에 있는지 추적·관리할 계획”이라며 “시스템이 80%는 완성됐다”고 소개했다. 삼성전자는 이달 안에 시스템을 구축해 하반기부터 친환경포장재를 사용할 계획이다. 적용하는 제품도 확대한다. 양문형 냉장고를 시작으로 김치냉장고 등 모든 냉장고와 세탁기에도 적용할 예정이다.

박 수석은 “종이상자를 쓰지 않는 것은 앞으로 피할 수 없는 추세로 이미 유럽지역 등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며 “삼성이 포장의 새로운 세계표준을 만들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2~3년 안에 국내 가전은 모두 재사용 포장재를 쓸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전자는 국내용 제품뿐 아니라 해외로 수출하는 제품에도 새로운 포장재의 적용을 확대할 계획이다.

종이상자보다 생산 비용이 비싸지만 40회 이상 쓰는 점을 감안하면 연간 100억원 이상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무엇보다 환경친화적이라는 게 장점이다. 종이상자 포장과 비교해 휘발성유기화합물이 99.7% 줄어 소비자와 유통 과정을 다루는 직원들의 건강에도 좋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수석은 “삼성전자 물량만 따져봐도 친환경 포장재 사용으로 남산에 있는 나무의 10배 규모인 연간 13만 그루의 나무를 보호할 수 있다”고 했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