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철 "계획 세운후 15일만에 전격 기공식…지금했다면 싸움질에 5년 걸렸을 걸"
“울산공업도시 건설은 무역 1조달러 달성의 초석이 된 한국 산업혁명의 시작이자 출발입니다.”

울산공업단지 입안과 건설을 주도한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84·한국형 경제정책연구소 상임고문)은 울산공업센터 지정 50주년(2월3일)을 앞둔 지난 26일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세계적인 산업도시로 성장한 울산을 보며 산파의 기쁨을 느낀다”며 이렇게 말했다.

오 전 수석은 1960~1970년대 국가재건기획위원회·상공부·청와대에서 일하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수출 위주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주도했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보(國寶)’로 부를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50주년 기념식에 초청돼 다음달 3일 울산을 찾는다. 서울 서초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오 전 수석은 허리가 좋지 않아 지팡이를 지니고 있었지만 팔순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고 목소리도 또렷했다.

오 전 수석은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은 현지 조사 후 보름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그는 “상공부 화학과장 때인 1962년 1월 초 국가재건최고회의 및 상공부 직원들과 특별열차 편으로 울산을 방문해 현장조사를 벌였다”며 “보고서를 받은 최고회의는 ‘보름 안에 기공식을 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떠올렸다. 오 전 수석은 “5·16 때 정부는 민생고 해결과 자주 경제 구축이라는 공약 이행과 외자 유치를 위해 공단 조성을 서둘렀다”며 “지금 같았으면 정치인들이 서로 자신들의 동네에 공단을 유치하려고 싸우면서 5년은 걸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겪은 혹독한 추위에다 말로 다 표현 못할 고생이 지금도 생생하다는 그는 퇴임 후 울산을 두세 번 정도만 찾았다고 했다. “상공부 화학과장 때 정초 휴일을 반납하고 울산이라는 곳에 처음 내려갔는데 그런 깡촌은 처음 봤어요. 울산 전역에 목욕탕이 한 개밖에 없던 시절이었죠. 혁명정부는 ‘기획서 만들기 전에는 서울에 올라올 생각도 하지마시오’라고 하더군요. 공장이 들어설 바닷가를 둘러보기 위해 소달구지만 다니는 좁은 길을 지프차로 어렵게 오가야 했죠. 부녀자들이 길에 나와 ‘한양 양반들이 공장을 지어준다’며 박수치고 만세삼창을 했어요.”

그는 “울산은 날씨, 용지, 항만 등 입지조건이 뛰어났고 전쟁이 터져도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기공식에서 ‘빈곤의 역사를 떨치고 민족의 숙원인 부귀를 마련하기 위한 의지가 깃든 공업화의 첫 출발’이라고 말했죠. 울산이 전국 최고의 부자 도시가 됐기 때문에 50년 전 약속한 꿈이 이뤄진 셈입니다.”

상공부 차관보로 일할 때는 국내 자동차·조선업체가 외국 회사와 합작하는 것을 막기도 했다. 독일 폭스바겐이 현대자동차에 합작을 제의했고 조선업체들의 경영권은 외국사에 넘어갈 처지였다. 그는 “자동차와 조선은 우리나라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키워야 수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며 “합작을 허용했다면 외국의 하청업체로 전락해 세계 일류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 전 수석은 50년 전처럼 우리나라는 공업제품 수출에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람 외에는 자원이 없는 만큼 끊임없는 기술 개발로 세계 일류 제품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외환위기를 1년 만에 극복한 것도 중화학제품 수출 호조 덕분이었다”며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첨단 제품과 함께 의료·문화·두뇌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의 효시로 불리는 그는 현 정부에 대한 쓴소리도 빼놓지 않았다. “우리의 앞날이 과학기술에 달렸는데 과학기술부를 없애 교육부와 합친 것은 말이 안돼요. 장관 중 기술자가 한 명도 없고 국회에도 기술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문 것은 문제죠. 박 전 대통령 때는 국회의원 비례대표에 과학자를 3명씩 배정하기도 했어요. 기술인력을 우대하고 키워야 합니다.”

오 전 수석은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전 대통령이 중소기업인들을 많이 지원하고 사기를 북돋워 줬던 일도 전했다. “한번은 고(故) 김봉재 중소기업진흥재단 이사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중소기업들은 빽이 없어 ‘빽, 빽’ 하고 죽는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박 전 대통령이 ‘내가 빽이 되겠다’고 했죠. 그후로 김 이사장이 “‘내 빽은 대통령’이라고 말하고 다니더군요.”

‘국보’라는 말을 듣게 된 사연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1970년대 후반 창원공단 시찰을 마친 박 전 대통령이 흡족해하면서 서울로 올라오는 대통령 전용차에 저를 태워 격려를 했습니다. 그날 저녁 서울시청 앞 프라자호텔에 마련된 만찬에서 수행원들과 기자들 앞에서 ‘오원철이는 국보야’라고 했어요. 순간 당황스러웠습니다. 주위에 경쟁자도 많았는데 견제를 받을까봐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를 정도로 긴장했어요.”

글=이건호 기자 leekh@hankyung.com

사진=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오원철 누구…60~70년대 산업정책 총지휘

1960~1970년대 상공부·청와대에서 일하며 석유화학·기계·전자·조선 등 주요 산업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황해도 풍천 태생으로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공군 소령을 거쳐 시발자동차와 국산자동차(주) 공장장을 지냈다. 1961년 5·16 직후 국가재건기획위원회 조사과장에 임명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울산의 미래' 국제 심포지엄 2월1일 개최…한경ㆍ울산시 주최

한국경제신문과 울산시는 2월1일 ‘울산공업센터 지정 50주년기념 국제 심포지엄’을 롯데호텔울산에서 연다. ‘조국 근대화 50년! 울산의 미래를 묻는다’는 주제의 이번 심포지엄에는 제롬 글랜 유엔미래포럼 회장, 조동성 서울대 교수, 안소니 미첼 코리아 어소시에이츠 경영자문 대표, 해리 반 뵈르덴 네덜란드 투자진흥청 대표 등이 참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