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즐기며 '형의 그늘' 벗어난 미하일 바흐친, 문예이론 새지평
어린 시절 두 형제는 모두 조숙했고 토론을 즐겼다. 형은 화려하고 외향적이고 충동적이며 원기왕성해 수시로 기분이 바뀌는 반면 동생은 침착하고 쾌활하며 내성적이고 겸손했다. 동생은 늘 형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후일 동생은 더 이상 형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지 않았다. 형이 페테르부르크대학 고전학부에 입학하자 동생도 이 학부에 들어가 함께 공부한다.

1918년 러시아 혁명과 내란으로 둘은 노선을 달리한다. 형은 백군, 즉 차르 군대에 지원해 창기병이 됐고 나중에 러시아를 영원히 떠났다. 소르본대에서 고전을 연구했고 이어 영국 케임브리지대로 옮겨 신화의 근원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케임브리지에 있는 동안 좌파계열 사람들과 친교를 맺는 한편 후일 논리철학의 대가로 유명해진 비트겐슈타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버밍엄대에 언어학부를 개설한 그는 1950년 심장마비로 죽을 때까지 그 학교에 재직했다. 그는 현대 그리스어에 대한 교과서를 체계화했지만 자신만의 언어철학 체계를 구축하는 데는 실패했다.

동생은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고 교사로 일했다. 45세 때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이야기》를 쓴 프랑수아 라블레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지만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1929년 쓴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제 문제》가 발표된 지 31년 만에 재평가받으며 화려하게 부활한다. 《장편소설과 민중문화》는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대표적인 그의 저작이다.

두 형제는 1926년 이후 단 한 번의 서신 왕래조차 없었다. 영국과 러시아라는 각기 다른 공간에서 살았지만 갈수록 연구 주제와 관점에서 놀랄 정도의 유사함을 보였다. 이는 유년 시절에 심어졌던 ‘씨앗’이 자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형은 동생이 아홉 살이 돼 함께 학교에 다닐 때까지 독일인 가정교사에게 함께 배웠고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함께 읽었다. 형은 11세 때 이미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었는데, 앎에 대한 갈증이 심해 새벽 4시에 일어나 칸트와 헤겔을 읽기도 했다.

독서로 조숙한 두 형제는 그들이 읽은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토론했다. 이런 토론들이 형제의 관심사뿐만 아니라 저작에도 영향을 주었다. 둘 다 고전주의자로 출발해 언어철학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놀랄 만큼 닮은 관점에 이르렀다고 바흐친 연구가인 K 클라크는 분석한다. 두 형제는 쌍둥이가 공간을 초월해 소통할 수 있다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코르시카의 형제들》이기도 했다.

이들의 이름은 니콜라이 바흐친(1894~1950)과 미하일 바흐친(1895~1975). 처음에는 형이 앞섰지만 나중에는 동생이 형을 앞질렀다. 바흐친가(家)는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러시아의 귀족계급으로 그의 증조부는 노예 3000명을 팔아 얻은 수입을 육군사관학교 설립에 보탰다. 조부는 은행을 세웠으며 아버지는 그 은행의 지점장으로 일했다.

이들 형제는 은행원 아버지가 빌니우스(리투아니아 수도)로 전근을 가면서 6년간 이 도시에 살았다. 러시아어가 공식 언어였지만 대부분 폴란드어와 리투아니아어를 사용해 어릴 때부터 두 개의 언어가 빚어내는 ‘이질 언어성’을 경험했다.

이것이 형제를 언어철학에 천착하게 한 배경이었다. 어린 시절의 말과 글이 ‘천재 형제’를 만들어냈고 문예이론의 새 지평을 연 것이다. “삶은 예기치 않은 일로 가득찬 것”이라고 한 미하일 바흐친의 말처럼 그의 삶 또한 예기치 않은 일의 연속이었다.

최효찬 < 연세대 연구원 · 자녀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