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갈 길 먼 의회민주주의
5년 가까이 끌어온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의 국회 처리는 22일 오후 단 4분 만에 끝났다. '11 · 22 기습작전'이라 불릴 만하다.

한나라당의 전략은 주도면밀했다. 지도부는 나흘 전부터 단독 처리를 준비하면서도 외부에는 24일을 'D데이'로 띄우는 연막작전을 폈다. 새해 예산안을 심의하기 위해 의원총회를 여는 척하다가 갑작스럽게 의원들을 본회의장으로 돌려 회의장을 점거한 과정을 보면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다. 홍준표 대표와 황우여 원내대표 등 단 네 명의 지도부만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황 원내대표는 의총이 끝날 무렵 "긴급사항이 있다.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와 아침에 만났는데 진정성이 의심됐다. 본회의장으로 이동한다. 오늘 통과시키자"며 의원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표결처리가 끝난 뒤 본회의장을 빠져 나오는 의원들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영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다. 홍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강행처리 시 차기 총선 불출마"를 장담했던 의원들로선 내년 총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야당은 아예 본회의장을 침실로 사용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단독 처리에 대한 항의농성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야당은 그간 협상을 통해 보완대책 등 얻을 건 다 얻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여당의 강행처리를 예상했던 터다. 다만 총선 전략 차원에서 몸싸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못내 아쉬웠는지도 모른다.

여야의 이런 모습은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야간 대화와 타협이 통하지 않는 구조,국익과 직결되는 문제를 정치적 이슈와 결부시키는 모습은 수십년 전부터 내려온 병폐다.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인 다수결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는다. 비준안이 국회로 넘어온 것은 2008년 10월이다. 3년 넘게 여야는 허송세월했다는 얘기다.

미국 의회는 우리와 한 · 미 FTA를 체결한 이후 4년 반 동안 협상문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집권 민주당과 공화당 간 의견 차이가 컸지만 결국은 표결처리 끝에 패자도 깨끗이 승복하는 자세를 보여줬다. 1966년 인분이 등장한 이후 해머 전기톱 최루탄 테러까지 이어지면서 국제적인 망신을 자초하고 있는 우리 국회와 대조적이다. 우리 의회의 민주주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김정은 정치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