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병철 회장이 그룹경영을 이끌던 1984년 4월.삼성은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과 의료기기 합작법인 '삼성GE의료기기'를 세웠다. 자본금 72억원짜리 회사였지만 이 합작법인에 거는 삼성의 기대는 컸다. GE의 앞선 기술에 삼성의 자본력을 더하면 시너지 효과가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초음파진단기,전신용 단층촬영기,심전계 등을 만들면서 2년여 만에 2500만달러어치를 수출하는 성과도 올렸다.

하지만 GE와의 합작은 17년 만인 2001년 깨졌다. 외환위기로 1993년 50%였던 삼성의 합작법인 지분이 1999년 10%로 줄어든데다 사업다각화보다는 '핵심과 집중'이 강조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뼈아픈 실패였다. 2009년 GE헬스케어의 국내 매출은 1899억원 수준이지만 글로벌 매출은 18조원을 넘어섰다. GE헬스케어의 한 관계자는 "최근 10년의 기술발전 속도는 지난 100년과 맞먹을 정도"라며 "삼성이 의료기기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국내 점유율이 더 높아지는 것은 물론 세계시장을 노크할 기회를 얻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삼성은 지난해 5월 5대 신수종사업의 하나로 의료기기 분야에 2020년까지 1조2000억원을 투자,매출 10조원을 올린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삼성이 다시 의료기기 시장에 귀환한 이유는 뭘까. 고한승 삼성미래전략실 신사업팀 전무는 "GE와 협업할 당시에는 X-레이,초음파진단기기 시장이 크지 않았고 자체 기술 역량도 부족했지만 지금은 기술력이 확보됐고 고령화 진행으로 헬스케어 산업이 부상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삼성 주요 계열사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작년 6월 혈액검사기를 출시한 데 이어 9월에는 X-레이 장비 제조업체 레이를 인수했다. 올해 초에는 초음파진단기 제조업체 메디슨을 인수했다. 현재 삼성전자는 삼성메디슨,레이 등과 함께 디지털 X-레이,자기공명영상진단장치(MRI) 등을 개발하고 있다. 고 전무는 "초음파 생산과 개발은 삼성메디슨에서,MRI와 컴퓨터단층촬영(CT) 등의 개발은 삼성전자 내 HME사업팀에서 나눠 맡고 있다"고 설명했다. 업계에선 삼성이 올해 안에 유방촬영용 '맘모 X-레이'를 내놓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MRI는 기술력을 축적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자체 개발할 것인지,국내 업체인 싸이메딕스와 제휴해 해외판매대행만 할 것인지를 놓고 저울질 중이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